30년간 민족 자존심을 짓누른 '한일협정'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5.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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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배상 못받고 법적·도덕적 면죄부만 줘…30년 지난 지금도 후유증 심각
올해 6월22일은 한·일 국교 정상화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30년 동안 한·일 관계는 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의 틀 안에서 유지되어 왔다. 그간 한국에서는 정권이 세 번 바뀌었고,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한·일 신시대 개막’이니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정립’이니 하는 새로운 구호가 등장했다.

그러나 국교 정상화 30년 문턱에서 나온 지난 6월 초순의 일본 와타나베 망언은 수교 이후 줄곧 우리 국민에게 제기됐던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시금 던져 주었다. 당시 우리 국민은 그의 망언 자체, 즉 ‘한일합방은 원만히 체결됐다’는 내용을 놓고 분개했다. 그러나 망언 이틀 뒤 그가 해명한 내용을 심각하게 생각한 국민은 얼마나 될까.

6월5일 들끓는 한국 여론과 일본 일각의 비판 속에 해명하는 자리를 마련한 와타나베는 이렇게 말했다. “당초 발언의 취지는 65년 일·한 관계 조약을 법적으로 뒤집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지, 한국 합방 조약 후 일본의 통치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뜻은 없었다. 지난 65년 일한협정 당시 한국 합방 조약이 불법이라고 하지는 않았고, 그에 따라 일본은 배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와타나베의 망언은 한일협정이 단순히 지나가 버린,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사로 한정되지 않는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준 셈이다.

14년 간의 우여곡절 끝에 65년 6월22일 전격 체결된 한일협정은 크게 한·일 기본관계조약, 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등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에서 한·일 기본관계조약은 최고 상위 조약이다. 따라서 이 조약에 무엇을 어떻게 정했느냐에 따라 다른 조약들의 수준이 가름된다.

협정 전문에 ‘식민지 청산’ 내용 없어

전문 첫머리는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국민 간의 역사적 배경과 선린관계와 주권 상호존중에 입각한 양국관계의 정상화에 관한 상호 희망을 고려하여…’로 시작된다. 여기에는 한·일 간의 과거 식민지 지배 관계를 인정하고 청산한다는 의사 표시는 어디에도 없다. 이에 대해 한상범 교수(동국대·헌법)는 “1905년 을사조약 이래 실로 60년 만에 회복되는 한·일 관계는 일본이 그동안 한국과 한민족에 대한 불법 강점과 만행을 시인하고, 그 법적 청산을 전제로 한 국가 사이의 합의여야 했다. 그런데도 첫머리부터 과거 두 나라 관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더구나 41년 임시정부는 일본에 공식 선전포고를 했다. 그 상태를 공식 종료시켜야 하는데도 조약에는 명시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한다. 바로 이렇게 시작해 버림으로써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법적·도덕적 책임이 면제되고, 우리의 민족적·국가적 권위와 자존심이 훼손됐다는 것이다.
정작 큰 문제는 기본조약 제2조이다. 제2조는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은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했다. 국가 간에 체결되는 중요 조약에 ‘이미’라는 막연한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이후 화를 불러들인 것이다. 조약 체결 뒤 한국 정부는 국민에게 1910년 8월22일 한일합방은 조약을 체결한 날로부터 무효라고 했다.

그러나 같은 시각 일본 정부는 자국민을 상대로 45년 패전과 동시에 무효가 되었으나 1910년 체결 당시는 유효하고 적법한 것이고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합법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일본 정부에 공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최근 망언을 한 와타나베는 스스로 밝혔듯이 바로 이 한일협정 규정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일본의 한국 지배가 합법적이라고 한다면 배상은 성립하지 않고 보상이나 독립축하금 정도의 원조가 될 것이며, 동시에 손해가 아닌 손실 보상을 한다는 법리가 성립한다. 기본관계 조약이 다른 조약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이에 기초해 ‘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 체결됐다. 이 협정은 전문에 ‘양국 및 양국 국민 간의 청구권’이라는 문구를 넣어 배상이나 보상과는 전혀 다른 범주에서 접근했다. 그런 다음 제1조에 “3억달러 가치의 일본국 생산물 및 일본 국민 용역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2억달러 상당의 생산물과 용역을 조달함에 있어 차관을 제공한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자국민에게 이 돈은 배상금이 아니라 독립축하금이라고 설명했다.

또 제2조는 ‘양 체약국은 양 국가 및 국민의 재산·권리 등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구체적으로 못박고 있다.

바로 이 조항은 지금까지 한·일 관계를 가장 긴장시키는 주 요인으로 엄청난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한일협정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는 종군 위안부, 징병·징용 피해자, 사할린동포 등 피해자 배상 요구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이 조항을 들먹이며 법적으로 모두 끝났다는 입장을 고수한 채 책임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한·일 회담 당시까지도 한국이 일본과 대등한 교섭 당사자가 아니라는 일본의 실력주의 정복 논리와 함께 한국에 대한 일제 지배는 정당했다는 패권의식이 깔려 있다.

일제 망령이 한일협정에 버젓이 끼여들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로 당시 한국 정부가 안고 있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은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등장했기 때문에 권력의 정치·경제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그 돌파구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급히 서둘렀다. 물론 51년 이래 막후에서 이를 종용해온 미국의 역할도 컸다(82~83쪽 기사 참조)

박정권은 집권 후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한·일 회담을 정치적으로 타결할 결심을 했다. 이에 따라 61년 11월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전격적으로 이케다 일본 총리와 회담했다. 이후 62년 10월 이른바 ‘김종필 오히라 메모’로 알려진 협정 타결의 기본 골격이 마련됐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일본 정계를 장악하고 있던 친한파들의 과거 식민 침략시대에 대한 향수와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 시절부터 갖고 있던 ‘긍지 어린’ 향수가 의기 투합했다. 이와 관련한 내막은 한일협정 체결 당시 한국측 대표단이던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의 회고로도 확인된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회상 30년, 한일회담>에서 ‘박대통령은 과거부터 알던 기시 전 총리에게 통치권자로서는 광복 후 처음으로 직접 친서를 보냈다. 기시씨로 대표되는 일본 자민당의 우익 성향 인사와, 우익일 수밖에 없는 5·16 세력의 의기 투합으로 후일 회담이 성공했다. 당시 일본 정계 지도자들의 친한적 태도는 과거 식민지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짙게 풍겼다’라고 적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추진된 한·일 회담이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민족 권리를 찾겠다는 외교 활동보다는 과거 식민지 시절 일본과 깊은 인연이 있는 특정인들의 비공식적 밀실 담합에 의존한 채 회담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절실히 요청됐던 ‘민족적 합의’는 설 자리가 없었다. 6·3사태로 불리는 전국민적 우려와 반대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계엄령 아래서 전격 처리됐던 것이다.

친한파, 망언 주인공으로 활약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졸속으로 체결된 한일협정이 아직까지도 한·일 관계에 엄청난 후유증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당시 협정 체결에 열성적이던 일본의 친한파들은 바로 일제시대 군국주의 침략자들이었다. 협정 체결 뒤 그들은 다시 각종 망언과 교과서 왜곡의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졸속 처리된 한일협정과 상관없이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야 한다는 피해 국민들의 피어린 행렬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정신대 할머니들과 태평양전쟁 피해자 유족들로 대표되는 이들의 움직임은 이미 한·일 양국의 벽을 뛰어넘었다. 특히 정신대 문제의 경우 피해자들의 피맺힌 절규와 활동은 유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엔인권위원회는 정신대 문제를 국제법상 시효를 따질 수 없는 중대 전쟁 범죄 행위라고 간주하고 조사 활동에 들어갔다.

물론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한일협정의 청구권 조항으로 이미 끝난 문제라는 입장을 보여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제적인 비난 여론에 밀려 일본인 민간기금 모금 방식의 보상안을 부랴부랴 발표하기도 했다.

또 36만여 명에 달하는 징용·징병 희생자 유족들은 일본 도쿄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고, 과거 만행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적절한 배상을 요구하며 4년째 법정 투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 6월12일 도쿄에서 열린 제13회차 재판에 원고측 대표로 참석하고 귀국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박칠봉씨는 “피고인으로 나온 일본 정부 대표는 ‘당시 군인·군속·노무자는 총독부가 적법 절차에 따라 낸 징집령으로 동원됐기 때문에 강제 동원이라 볼 수 없고, 이미 한일협정에서 법적으로 끝난 문제이다’라며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민족 자존심을 걸고 끝까지 싸워 일제 만행을 사과 받고 정당한 배상을 받아낼 것이다”라고 전했다.

결국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피어린 노력은 한일협정이라는 굴레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여전히 능욕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뒤틀린 한·일 관계는 한국 정부의 책임과 과오에도 기인한다. 군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 안되는 원조 자금에 민족의 권리를 팔아버린 행위는 그 정통성을 인정하든 않든 간에 우리 정부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일 간에 진정한 우호 협력 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원점으로 돌아가 굴욕적이고 부당한 한일협정 내용을 수정하고 다시 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다(오른쪽 딸린기사 참조).

한·일 기본관계조약 제3조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정하고 있다. 때문에 북한·일본의 수교 협상이 본격화하면 어떤 식으로든 한·일 간의 입장 조정은 필요하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YS, 65년에 “흑막에 싸인 굴욕 외교” 분노

조약을 개정할 민족적 중요성과 관련해 강창일 교수(배재대)는 “조약 개정을 통해 일본의 식민 지배 자체가 불법 강점이었음을 공식으로 인정할 때 비로소 배상 차원에서 과거 청산의 돌파구가 열릴 것이다. 이 조약 개정은 국민운동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문민 정부라고 주장하는 김영삼 정부도 민족 자존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일협정을 체결할 당시 야당인 민정당 국회의원으로서 전국민적인 매국 외교 반대 운동에 동참한 바 있다. 김대통령은 65년 5월호 <세대>에 ‘흑막에 싸인 굴욕적 외교’라는 기고문을 통해 한일협정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시간이 약이라는 격언이 지닌 아이러니를 가지고 자위하기에는 참으로 민족의 이름을 걸고 생각해볼 때 그저 어처구니없는 눈앞의 사태이지만…중략…한·일 국교는 과거 일본이 우리 한국을 침략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먼저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이런 행위를 청산하는 기본 문제를 엄격히 규정하고, 그 기본 원칙을 근거로 모든 현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중략… 한·일 회담에서 중대한 초점의 하나인 대일 청구권은 36년간 일본의 식민지 통치 기간에 우리가 입은 물질적 피해와 일본 통치 권력에 희생된 애국 선열을 위시한 애국 시민,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인 전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강제로 동원되고 혹사된 백만 한국 청년과 여성들의 피와 땀의 대가도 아울러 보상돼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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