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팽창 겁나 발 못뺐다”
  • 워싱턴·金勝雄 특파원 ()
  • 승인 1995.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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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 국방장관 맥나마라, 회고록 <베트남의 비극과 교훈>에서 참회
지금부터 30년 전인 65년 봄, 미국 합참의장 헤럴드 존슨 대장이 존슨 대통령의 특명으로 남베트남(월남) 땅에 발을 들여 놓았다. 막 시작된 미국의 북베트남(월맹) 폭격 효과와 문제점을 베트남 현지에서 직접 진단하라는 대통령의 특명에 따른 것이다.

귀국 후 존슨 합참의장은 대통령에게 북폭 강화와 지상군 파병을 건의했다. 그는 구체적인 파병 인원으로 보병 1만6천명을 상신했던 것으로 당시의 언론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숫자는 터무니없이 적은 데다 보고 내용마저 전혀 다른 것이었음이, 당시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79)의 입을 통해 불거져 나와 화제다.

맥나마라가 공개한 존슨 합참의장의 보고는 이렇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 미군 파병 수를 5년 내에 50만명 선으로 유지해야 한다’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실제 5년이 채 못되는 69년에 이르러 주월 미군 숫자는 50만을 넘어섰다. 맥나마라의 폭로가 겨냥하는 목표는 누구인가. 또 그가 자신의 상관인 대통령과 부하를 ‘고발’하고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존슨, 차기 선거에서 지지 않기 위해 확전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바로 그 보고의 현장에서 속수무책으로 사태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국방장관 맥나마라 자신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다. 또 당시 베트남전을 수렁으로 이끌었던 3두마차 가운데 다른 2명인 딘 러스크 국무장관과 맥조지 번디 백악관 안보보좌관에 대한 질책이기도 하다.

그의 회고록 <베트남의 비극과 교훈(In Retrospect:The Tragedy and Lessons of Vietnam)> 이 미국 전역에 큰 충격을 일으킨 이유는 바로 이런 의문에 있다. 이 회고록은 베트남전의 결정적인 확전을 초래했던 65년 존슨 합참의장의 사이공 방문 시기로부터 만 30년, 또 75년 4월30일 사이공 함락으로부터 정확히 20년이 되는 시점에 맞춰 의도적으로 출간된 회고록임에 틀림없다.

랜덤하우스사가 출간한 이 회고록은 이처럼 특정 시기를 겨냥한 출판사측의 상업적 계산으로 관심의 대열에 성큼 올라섰다. 그러나 이 관심이 정작 충격으로 모양새를 바꾸는 데는, 이 회고가 한낱 있을 법한 회고로 그치지 않고 참회와 통한 수준으로 격상돼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상술의 범접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맥나마라의 휴머니즘을 읽는다.

회고록 하면, 열이면 열 모두가 자신의 업적을 미화하거나, 공직 시절 자신의 소행에 대한 정당화 또는 합리화가 형식의 주종이 돼온 관행에 비추어 맥나마라의 ‘참회’는 시원한 한 줄기 소나기다. 역대 정치 지도자들의 무능과 단견, 책임 전가에 식상해 온 미국의 정치 풍토에서 스스로에게까지 무자비하리만큼 칼을 대는 맥나마라의 결행이 독자들에게 용기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65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로 묘사되어 있다. 이 때는 그가 케네디 정부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고 나서 4년이 된 때이자, 케네디 암살로 후임 대통령 직을 계승한 존슨 대통령 정권에서 역시 국방장관을 2년째 맡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케네디와 존슨이라는 두 대통령의 지도력과 개성, 특히 사물을 보는 안목이 어떻게 다른지와, 베트남 사태를 통해 그 안목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맥나마라는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케네디의 입장은 처음부터 단호했다. 맥나마라는 책을 통해 케네디가 ‘베트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무조건 개입할 수는 없다며 미 지상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호히 배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베트남전 확전은 따라서 케네디를 계승한 민주당 대통령 존슨이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가 될 매파 정치인 골드워터의 강경론에 밀리지 않기 위해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지상군 증파를 단행한 데서 유래한 결과였다고 이 회고록은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책에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전임자인 케네디와의 차별화를 노린 존슨 대통령의 의도와 취지가 확전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에서 베트남전이 지닌 새로운 정치적 측면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베트남전이 확대되던 65년 인근 인도네시아에서는 수하르토의 반공 쿠데타가 성공했다. 당시 미국이 우려해온 동남아의 적화(赤化)라는 도미노 이론을 극복할 결정적 단서가 된 사건이었다.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의 이른바 공산주의 봉쇄정책(Containment)의 구축자인 조지 케넌 같은 인물도 당시의 인도네시아 사태를 공산주의의 퇴조(특히 중국을 염두에 둔)를 뜻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간주했다.

맥나마라 역시 ‘이로 인해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이해관계가 당시 크게 감소했던 것이 사실’임을 이 책을 통해 인정하고 있으나, ‘케넌의 지적은 우리의 관심을 끌지도,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고 적이 안타깝게 실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베트남전 수행이 미국의 국익이나 전략에 아무런 개선이나 이득이 되지 못하는 데다 승전 가능성마저 희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운 나라(베트남)를 계속 피폐케 하고, 젊은 미군들을 더욱더 사지로 몰아넣었던’ 존슨 행정부의 무지와 무관심, 오산, 정치적 편법, 그리고 용기 부족은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 가장 큰 원인을 저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알차게 다듬어진 하관, 벽까지 뚫을 듯 날카로운 눈매를 지니고 독전에 독전을 거듭하던 맥나마라의 모습을 그 시대 세계인들 거개가 기억하고 있다. 오십 안팎의 그 다부진 얼굴이 지금은 팔십을 코앞에 둔 노인으로 변해 스스로의 실책과 오판을 참회하고 고백한 것이다.

맥나마라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실패했던 구체적 이유로 열한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첫째는 적(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지정학적 의도를 오판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발호와 준동으로 미국이 당하게 될 위협만을 너무 과대하게 평가했을 뿐, 베트남 그 자체가 미국한테 그토록 중요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했다는 것이다.

이밖에 베트남전 실패 요인으로 이 책은 △그들이 우리처럼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보편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오판 △적과 동지의 오판, 그리고 이를 초래한 역사·문화·정치에 대한 이견 △의회와 여론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베트남전 패배, 미국의 냉소주의 키워

또 △미국 지도자나 국민이 미국의 당면 과제가 아닌 한 그리 박식하지 않다는 사실을 미리 깨닫지 못한 데다 △미군 단독이 아닌 국제 기구에 의한 다국적군 형태로 개입하지 않았던 것도 실패한 원인으로 열거하고 있다. 이 책은 끝으로 △국제 문제 역시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제때 해결되지 않는 대목이 많다는 것을 진작 깨닫지 못한 것도 패인의 하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첫번째 요인, 즉 적의 지정학적 의도를 오판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리 크게 설득력을 지니는 패인 분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첫번째 요인은 따라서 이 책의 결론이자 책을 쓴 이유도 되는 셈인데, 이 대목과 관련해 맥나마라는 ‘베트남 사태는 베트남 사람 자신의 손으로 종결됐어야 했다’고 마지막 주석을 달고 있다.

베트남마저 적화할 경우 서방 세계의 안보가 크게 와해될지도 모른다고 미국은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게는 이런 오해나 맹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그의 국방장관 재임 후반부인 63년부터 67년 사이에 다섯 차례나 주어졌는데도 결국 실기했다고 그는 아쉬워했다. 특히 68년 12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는, 북폭을 아무리 강화해도 월맹의 남침 의도를 결코 저지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미군이 당장 철수하더라도 이 나라에 대한 미국의 전반적인 안보 이익은 크게 손상당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고 그는 밝혔다.

그는 이 책이 수반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의문, 즉 이 책을 왜 썼느냐와 그 출간 시점이 왜 하필 지금이냐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해 꽤 감동적인 답변을 준비했다. 그는 우선 이 책을 ‘쓰고 싶지 않았던’ 책이라고 전제한 후, 미국인의 의식 세계를 (한세대 이상) 지배해 온 가장 대표적인 병폐로 냉소주의를 지목했다. 국민들의 냉소주의의 주범으로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 실패를 꼽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미국 정부와 정치 지도자들이 그러한 국민들을 향해 허리에 두 손을 얹고 당당히 말할 때가 왔다는 것이 맥나마라의 출간의 변이다. “왜 우리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던가를 미국민에게 이해시키자는 거요!”

국방장관 시절 그는 베트남 현지 일선 지휘관들에게 사살한 베트콩의 머리 수를 매일 보고토록 명령한 ‘극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극성은 국방장관 이전의 포드자동차 사장 시절부터 그후 세계은행 총재 시절까지 일관한 그의 대표적 정서이다. 이 회고록이 던지는 충격은 따라서 책의 내용보다, 그토록 오랜 시절을 일관하다 깨어져 거듭난 정서의 회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소개하는 <워싱턴 포스트>의 제목‘베트남 메아 쿨파’(베트남은 내 탓이로다!)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진가를 제대로 파악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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