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박홍규 전집>박홍규
  • 이정우 (서강대 교수·철학) ()
  • 승인 1995.12.2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간이 언어로 사상을 표현하기 시작한 이래 수많은 사상이 담론사를 풍요하게 했다. 그 중에서도 ‘서구 존재론사’만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극한까지 내려가 깊이 사유한 경우는 찾기 드물다. 서구 존재론사의 문제들은 모두 그리스에서 제시되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 철학은 모든 깊이 있는 사유의 원천을 형성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이 서양 철학을 수용한 것은 그리스에서부터 이루어지지 않고 독일에서부터 이루어졌다. 그러나 70년대 이후로는 서구 철학 연구가 다양화하였으며, 특히 그리스 철학이 제대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박홍규 전집> 출간은 한국에서의 서구 철학 연구가 초보적인 단계에서 벗어나 한 차원 도약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물이다. 이 저작에서 소은 박홍규 선생은 서구 철학의 근원으로 돌아가, 서구 철학의 난해한 문제들이 처음으로 사유의 지평 위로 솟아오른 원초적 상황을 드러냈다.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문제이며, 그 중에서도 근원적인 문제들, 즉 ‘아포리아’들이다.

소은은 그리스 철학의 근원적인 아포리아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면서 우리를 ‘근원적으로 사유함’이라는 철학의 최초 사명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므로 이 저작은 단지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유할 힘을 제공해 주는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의 사유가 벽에 부딪쳤을 때 <박홍규 전집>은 늘 우리의 반려자가 되어 줄 것이다.

<박홍규 전집>이 서구 존재론사의 근원적 아포리아들을 다룬다 함은, 과학과 형이상학의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문제들을 다룸을 말한다. 실증 과학과 형이상학의 접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시간의 문제, 무한과 연속성의 문제, 원인의 문제, 인식과 존재의 문제 등등)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도 깊이 있는 문제들을 형성한다.

그리하여 <박홍규 전집>은 서구의 과학과 형이상학 전체를 한눈에 조감할 넓은 안목을 제시한다. <박홍규 전집> 출간은 다시 말해 우리가 서구 철학을 그 전체적 모습에서 바라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서구 철학 연구의 한 이정표이자 우리가 주체적으로 철학함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이 책 발간을 우리 지성사의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소은 선생은 오로지 학문만을 벗삼아 한평생을 산 현대의 선비였다. 보직이라고는 학과장 자리 외에는 맡은 적이 없으며, 책을 읽고 사색하는 일말고는 일체의 잡무를 멀리했다. 제자들이 아무런 철학적 문제 없이 찾아오는 것도 싫어했으며, 지적으로 너무나 정직했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몇몇 글 외에는 거의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에게 철학이란 그저 교수 자리나 바라보고 하는 사치스러운 행위가 아니었다. 그에게 사유한다는 것은 하나의 투쟁이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장 심원한 문제들과 부딪쳐 고통하는 것이었다. 실러가 칸트에 대해 한 말을 우리는 소은 선생에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평범한 생애와 그토록 비범한 정신 사이의 저 놀라운 대조를 보라!”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