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홍콩, 자본주의 발전 ‘낙관’
  • 홍콩· 이흥환 북경 특파원 ()
  • 승인 1996.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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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환 앞둔 홍콩 르포/자본주의식 경제 발전 ‘낙관’
 
유니언 잭(영국 국기)이 내려오면 오성홍기(중국 국기)가 오른다. 20세기 말 최대의 역사적 사건인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는 날이 앞으로 1년을 남겨두고 있다. 홍콩의 중국 귀속을 만 1년 앞둔 96년 6월 말 현재 홍콩은 변신하려는 몸부림으로 부산하다. 중국에 반환될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이 표준 중국어인 만다린(보통화라고 부름) 채널을 가동한 지는 이미 오래이다. 세계 4대 금융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홍콩에 진출해 있는 외국계 은행 직원들도 보통화를 배우고 있다. 한국의 금융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근무 시작 전 1시간씩 북경 출신 어학 선생에게 보통화 ‘후다오(輔導:교습)’를 받는다.

학생들이 저녁 시간에 사설 학원에서 보통화를 배우는 것이 새로운 유행이 되었는데, 그들 틈에는 발 빠른 관료들도 섞여 있다. 보통화 학습 열기는 관가에도 불어닥쳤다. 경찰학교에서는 훈련생 교과 과목에 들어 있던 두 달 과정의 집중적인 광동어 학습 과목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를 검토하고 있다. 보통화가 필수 교과목으로 채택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이다. 경찰학교 푸춘콩 교장은, 경찰관이 광동어와 영어뿐만 아니라 보통화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라고 말한다. 홍콩 시내 곳곳에 널려 있는 외환 환전소에 인민폐도 취급한다는 간판이 나붙기 시작한 것은 2년 전부터다.

홍콩특구주비위 구성, 특구 주둔부대 편성 등 정부 차원의 공식 조처 외에도 중국 정부가 홍콩을 넘겨받기 위한 비공식적이고 간접적인 움직임 역시 깊고 폭넓게 추진되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홍콩무역관의 한 관계자는 중국이 이미 홍콩에 대한 공부를 끝냈다고 말한다. 84년 12월 홍콩의 중국 반환을 구체화한 영국과 중국 간의 공동성명이 채택된 직후인 85년부터 중국은 홍콩 침투 전략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했고, 10여 년 동안의 학습기를 거쳐 이제 인수 날짜만 기다리고 있다.

중국 자본, 홍콩 부동산 30% 점령

홍콩의 싸틴은 홍콩의 신경망을 조절하는 컴퓨터 메인센터가 있는 곳이다. 이 센터에서는 2년 전부터 중국이 파견한 2백여 명이 집단 생활을 하며 컴퓨터 교육을 받고 있다. 1인당 교육비는 3천달러이다.

북경 당국이 홍콩 인수를 위해 공을 들이는 분야는 홍콩 현지의 컴퓨터 교육뿐만이 아니다. 영국계 무역회사인 J상사의 한 중역은 “3~4년 전부터 중국에서 비공식으로 파견한 인수 요원들이 홍콩에 와서 체류하고 있다. 주로 중국계 회사에서 직원으로 근무하는데, 일상 생활에서부터 여론 동향, 시장의 물가 변동에 이르기까지 홍콩의 모든 것을 취합하고 있다. 약 2만여 명 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중국 대륙 자본의 홍콩 침투도 놀랍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부동산 투자이다. 89년 천안문 사태로 홍콩의 부동산 경기는 침체의 늪에 빠졌다. 부동산 시장에 매물이 쏟아져나왔다. 중국 자본이 이를 대량 사들였다. 90년부터 94년까지가 전성기였다. 반면에 영국 자본은 94년부터 홍콩에서 빠져나가는 추세를 보였고, 일본과 미국은 관망하는 자세였다. 결국 비교적 규모가 큰 부동산은 현재 중국 자본끼리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황이다.

홍콩의 금융 중심 거리인 센트럴가는 고층 빌딩 숲이다. 중국은행(Bank of China)은 이 거리의 중심지 땅을 매입해 초현대식 70층짜리 첨탑 빌딩을 세웠다. 이 건물은 이제 홍콩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센트럴가 빌딩 숲속에 솟아 있는 상당수 마천루의 소유주가 중국계라는 사실은 이미 낡은 정보이다. 홍콩 부동산 3분의 1 가량을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으리라는 추측만 무성하다. 정작 관심거리는 홍콩에 침투한 중국 자본의 규모가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지만, 정확한 공식 통계가 나온 적이 없다.

중국계 은행 또한 홍콩 금융계에 깊숙이 파고 들었다. 홍콩에 진출한 중국은행 산하 은행만 13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강성에서 진출한 절강흥업은행 등 각 성이 독자적으로 진출시킨 은행들도 영업망을 가동하고 있다.

홍콩은 3년째 불경기이다. 그러나 부동산 값은 계속 오름세를 유지하고 있다. 93~95년 최대 3~4배 폭등한 적이 있고, 97년 홍콩 반환 이후 1~2년 간의 조정기를 거쳐 홍콩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 99년께에 절정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는 시각이 유력하다.

불경기 탓에 주춤했던 건축 경기도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부동산 시장은 금융 시장 못지 않게 97년 이후 홍콩의 장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현재까지의 추세에 따르면 부동산 시장은 홍콩의 미래를 낙관하는 쪽이다. 아파트 건축 붐이 서서히 일기 시작한 것이 단적인 증거이다.

홍콩의 부동산 시장을 지켜보고 있는 한 한국인 관계자는 97년 이후의 홍콩 부동산 경기를 이렇게 전망한다. “홍콩 부동산 가운데 최소 25%는 모두 중국계 자본이 사들였다. 3분의 1에 가깝다는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거의 2천억달러에 가깝다. 매입 대금은 대부분 현금이 아닌 은행 대출금이었다. 중국계 은행의 대출도 적지 않다. 부동산 값이 내리면 은행은 치명타를 입는다. 부동산 회사는 또한 홍콩의 주식 시장을 움직이고 있다. 결국 부동산 값은 절대 하락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주택지인 다이쿠징(太古城)의 집값은 현재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홍콩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의 핵심은 중국이 홍콩과 이미 ‘몸을 섞은 사이’라는 것이다. 이제 홍콩 없는 중국은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에 중국이 홍콩을 그대로 살려둘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실제로 광동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화남 경제권은 거의 다 홍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홍콩이 먹여 살리는 광동성의 인구가 8백만명에 달한다는 비공식 통계도 나와 있다.

중국에 들어가 있는 외국인 투자액의 약 60%는 홍콩 자본이며, ‘홍콩 공장은 텅 비어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홍콩의 제조업체는 벌써 중국으로 다 옮겼다. 중국에서 생산된 제품이 홍콩을 거쳐 전세계로 나가는 유통 구조에서, 홍콩은 가장 중요한 마케팅 관문 구실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홍콩이 주저앉는 모습을 중국이 바랄 리 없다.

홍콩·중국 ‘한집 살림’ 순탄치 않을 듯

홍콩 또한 외자 유치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금융 시장 중심지이다. 상해는 아직 홍콩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상해가 홍콩의 금융 기능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려면 최소한 20~30년은 걸리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홍콩 한인상공회의 成石柱 부회장은 지난 3월12일 북경에서 열린 국제상공인회의(IBC)에 참석한 자리에서 주용기(朱鎔基)·전기침(錢其琛) 부총리 등 중국 정부의 고위 관료들에게서 홍콩 문제에 대한 견해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성씨는 주용기 부총리가 홍콩과 상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더라면서, 그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상해는 아직까지 지역 금융의 중심지이다. 홍콩은 과거 백년 이상 국제 금융의 중심지로서 나름의 비결이 있다. 하루아침에 홍콩의 금융 기능을 상해로 옮기지는 못한다. 홍콩을 사회주의 식으로 다스려서는 얻을 것이 없다. 그러면 홍콩은 죽고 만다.”

대만의 존재는 중국이 홍콩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리라는 정치적 낙관론의 또 다른 근거를 마련해 준다. 1국2체제를 주장하는 중국으로서는 홍콩을 다른 체제로 인정하고 별탈 없이 유지시키는 모습을 대만에 보여줄 부담감도 안고 있다.
‘97년은 홍콩의 절정기가 될 수도 있다.’ 일부 낙관론자들은 이런 말도 서슴지 않는다. 97년 7월을 전후해 약간의 심리적 동요가 있을 것이고, 정치·행정 면에서 불확실성이 말끔히 가시지는 않겠지만, 경제 측면에서는 오히려 특수 경기를 누릴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런 낙관론자들도 막상 중국과 홍콩의 한집 살림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점에는 쉽게 동의한다. 지난 6월 초 국제투명회조직은 세계 각국의 청렴도를 조사해 순위를 매겨 발표한 바 있다. 홍콩은 일본에 이어 18위였고, 대만이 29위, 중국은 최하위에서 다섯 번째인 50위로 평가되었다. 18위와 50위의 짝짓기가 성공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힘들다.

홍콩인들은 깨끗한 정부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염정공서(廉正公薯:ICAC)를 손에 꼽는다. 총독이 직할하는 감사 부서로 우리의 감사원 같은 곳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염정공서는 검찰권을 가지고 있다. 정청 공무원이 공무와 관련해 밥이라도 한끼 잘못 얻어먹었다가는 자리를 보존하기 어렵다. 공무원 청렴도에서 홍콩과 싱가포르는 아시아 최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97년 이후 염정공서가 폐지될 것이라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홍콩과는 매우 이질적인 중국의 비즈니스 관행이 홍콩에 도입될 가능성은 배제하기 힘들다.

 
중국·영국 막바지 신경전 치열


홍콩에 기반을 두고 중국 기업을 상대로 24년째 사업을 해왔다는 한 한국 기업인은, 홍콩의 행정은 사전 승인이 거의 없고 사후 관리만 있는 제도이고 행정 규제도 극히 제한적이어서, 공무원과 같이 밥을 먹거나 할 이유가 없다면서 “97년 이후는 사전 승인이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홍콩이 중국의 국익에 반하는 외세 유입 창구 구실을 할 경우 중국 정부도 행정 규제의 칼을 들이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국 비즈니스의 관행을 볼 때 앞으로는 공무원을 자주 찾아 보고 밥도 같이 먹어야 할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질적 요소의 충돌은 중국과 영국 정부 간의 막바지 신경전에서 극대화하고 있다. 임시 입법회 구성에서부터 주권 반환식 장소, 행사 참석 인원 문제에 이르기까지 홍콩 반환 1년을 앞두고 양국은 치열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심지어 주권 이양 행사식의 주체가 누구이며, 누가 초청장 발송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지도 입씨름거리이다.

크리스토퍼 패튼 홍콩 총독은 기회 있을 때마다 홍콩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북경 당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현실적인 실리 외교를 기반으로 하는 영국 정부의 외교 노선과 달리 원칙주의를 고수하면서 ‘쇠막대’를 휘두르는 패튼 총독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다. 양국 관계에 괜히 돌을 던지는 행위이며, 역사에 남는 인물로 평가 받고 싶어하는 과잉 행동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패튼 총독측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과도기에는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92년 패튼 총독이 정치개혁 추진을 발표한 이후 지금까지 그와 면담하기를 거부하고 있으며, 영국측은 패튼 총독에 대한 지지 입장을 확인하고 97년 6월30일까지 총독 유임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홍콩 정청의 공무원 신상 기록 이관 문제도 양국 간에 첨예한 마찰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국이 공무원의 신상 기록을 일찍 넘겨달라고 하자, 영국은 정청 문서를 일괄적으로 넘기지는 못하겠고 필요하다면 사안 별로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맞서고 있다. 홍콩 정청 공무원들의 거취 역시 홍콩의 장래와 관련해 주목 대상이다. 세계적인 테크너크랫 그룹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3~5년씩 계약을 맺고 뉴질랜드나 호주 등에서 홍콩으로 건너온 전문가들이다. 이 그룹이 유지되지 않을 경우 ‘홍콩 주식회사’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다.

홍콩의 베트남 난민 문제 풀이도 관심거리이다. 반환일 이전까지 홍콩내 베트남 난민 전원(1만9천명)을 송환하라는 중국의 요구에 대해, 영국은 유엔고등난민판무관과 협조해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입장만 밝히고 있다.

영국은 식민지 경영뿐만 아니라 식민지 인계 방법 면에서도 적잖은 경험을 축적해 놓은 나라이다. 홍콩의 한 기업인은, 홍콩에서 깃발을 내린다고 훌훌 털고 나갈 영국이 아니라면서 “하지만 중국도 영국의 식민지 인계 방법을 벌써 파악하고 대처하는 것 같다”라고 평한다. 홍콩 신공항 건설과 매립지, 컨테이너 터미널 건설 등 이권이 걸린 대규모 토목 공사를 놓고 양국이 벌이는 줄다리기는 마지막 ‘고깃덩어리’ 싸움이 되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홍콩이 기본적으로 피난민 사회라고 지적한다. 홍콩의 중국계 주민 대다수는 중국 대륙에서 건너왔고, 생존 문제가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 저소득층이 대부분이다. 홍콩의 화려한 고층 건물군 뒤편으로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방 한칸짜리 정부 주택 아파트가 즐비하다.

“중국에 넘어가든 영국에 남든 상관없다”

홍콩의 쇼핑가인 침사추이에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중국계 첸궈핑씨는 “나는 상인이다. 홍콩인의 99%가 상인일 것이다. 철시하고 문닫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홍콩이 중국에 넘어가든 영국에 남든 우리는 상관없다. 가게 문만 열 수 있으면 된다. 이민은 갈 처지도 못된다”라고 말한다.

캐나다의 밴쿠버에는 홍콩 이민자 약 6만명이 거주한다. 홍콩과 밴쿠버의 합성어인 ‘홍쿠버’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홍콩에서 캐나다·호주·미국·뉴질랜드로 빠져나간 해외 이주자는 88년 이후 1년 평균 5만명 안팎이다. 입출국 통제가 없는 홍콩의 행정 특성상 정확한 통계는 잡히지 않지만, 지난해까지 홍콩 인구의 7%에 가까운 총 43만4천여 명이 홍콩을 떠난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중 70% 이상은 외국 여권을 소지한 채 홍콩에 돌아와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콩 뱁티스트 대학 부설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97년까지 홍콩인 약 20만명이 해외로 이주할 것이며, 96년 한 해 이주자는 9만~10만명 선이 될 것으로 예측한다. 하지만 이주자들이 97년 이후 홍콩의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 같지는 않다.

천안문 사태 1주년이 되던 90년에 북경 당국을 규탄하는 홍콩의 시위 군중은 8만명에 달했었다. 홍콩의 중국 반환을 1년 앞둔 지난 6월 초, 천안문 사태에 항의하는 촛불 시위에 참가한 시위대는 1만5천여 명에 불과했다. 지난해 9월 치른 입법의회 선거의 투표율은 역대 선거 사상 최고라고는 하지만 35.8%에 그쳤다. 홍콩 주식회사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현실 중시 안목은 97년 7월1일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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