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경제 독감' 전세계 전염되는가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8.09.0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남미 통화 가치 · 주가 추락 '지구 공황' 우려‥ 선진국 '예방 접종' 적극 나서
‘아시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경제 위기가 아시아 지역을 넘어 다른 지역으로 파급되고 있다.’ 신용 평가 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산하 세계적 경기 예측 기관인 DRI(Data Resources Institute)가 지난 8월에 발표한 ‘일본과 아시아에서 벌어질 최악의 시나리오가 가지는 함축된 의미’에 관한 특별 연구서에 나온 구절이다. 이 기관은 7년 동안 호황을 누리고 있는 미국과 경기 회복세가 뚜렷한 유럽 시장에 아시아 독감이 상륙했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이 지역보다 먼저 독감에 걸린 곳은 러시아이다.

러시아는 경제 체질이 허약해 아시아를 강타한 경제 위기에 노출되자 힘도 못 써보고 앓아 누웠다. 러시아 정부는 8월17일 90일 동안 외채 상환 지불을 유예하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또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루블화를 사실상 34% 평가 절하했다. 이 조처로 인해 러시아에 투자한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있고 러시아는 금융 공황에 직면했다. 세계경제인협회 격인 컨퍼런스 보드의 켄 골드스팅 이코노미스트는 <시사저널>과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러시아 경제 위기는 통제 경제에서 시장 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정책 실패가 누적되면서 러시아 경제 체질이 허약할 대로 허약해져 발생했다”라고 말했다.

성급한 경제학자들은, 아시아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가 러시아를 강타한 뒤 동유럽과 남미마저 파급되어 결국 세계 경제의 철옹성인 미국 경제까지 침체의 늪에 빠뜨려 세계 공황이 일어나리라고 전망했다. 루블화 평가 절하가 아시아 경제의 운명을 쥔 중국 위안화와 일본 엔화를 비롯해 전세계 통화의 잇단 평가 절하를 유도해 전세계 주가와 통화를 폭락시키는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 금융 위기 올해 안에 재발” 주장도

하지만 세계 경제 침체론을 주장했던 경제학자들은 불확실성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 금융 시장의 예측 불가능성에 또다시 당황해야 했다. 추락을 예상했던 엔화가 오히려 강세를 보이고 아시아 주식 시장도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 외채의 40%를 차지하는 독일의 마르크화도 강세를 보이고 미국 다우존스 지수도 소폭 반등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러시아발 세계 공황론은 실현되지 않는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러시아 경제 위기는 오히려 엔화 가치 하락과 위안화 평가 절하가 몰고올 파장을 염려해 엔화 약세 기조를 뒤집는 국제 사회의 움직임을 가져 왔다. 와튼 계량경제연구소(WEFA) 지니오 스타란작 경기 장기 예측 디렉터는 <시사저널>과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심리적 불안 요인만 제거되면 러시아 위기가 세계 금융 공황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세계 공황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지난해 아시아를 휩쓴 금융 위기가 올해 아시아 지역을 다시 덮쳐 엔화와 위안화 가치가 추락하고 동유럽과 중남미로 번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 대통령 경제 자문역을 지낸 경제학자 데이비드 맬퍼스는, 루블화 평가 절하가 세계 경제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이 어렵게 위안화 평가 절하를 막고 일본 엔화도 달러당 1백50엔 선을 넘지 않게 버티자, 경제의 불안한 기운이 경제 체질이 허약한 러시아로 물꼬를 틀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소 늦어질 수는 있지만 아시아 금융 위기가 올해 안에 재발하리라고 확신한다. 그는 또 러시아 경제 위기가 터키와 그리스를 비롯한 서유럽 개발 도상국, 동유럽, 인도에 타격을 주고,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는 홍콩과 브라질에도 악영향을 미치리라고 예상한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러시아의 지불 유예 선언이 지난해 일어난 동남아시아 위기보다 세계 경제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치리라고 전망한다. 러시아 경제 위기가 경제 여건이 비슷한 폴란드·헝가리·체코를 비롯한 이웃 국가들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실제로 동유럽 국가들의 주가와 통화 가치가 하락하고 금융 위기가 뚜렷해지고 있다. 와튼 계량경제연구소 스타란작 디렉터는 “동유럽 제품들은 서유럽 시장에서 러시아 제품과 경쟁하고 있다. 따라서 루블화 가치 하락은 동유럽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다. 서구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러시아와 더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라고 말했다(47쪽 인터뷰 참조).

아시아와 중남미 시장도 제한적이나마 영향을 받을 것이다. 외국인 투자가들로 하여금 불안정한 신흥 시장에 투자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어 금융 위기에 처한 아시아를 비롯해 개발 도상국이 경제 회복에 필요한 외자를 유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로 외국 투자자들은 러시아와 아시아에서 돈을 빼서 미국 시장에 집어넣고 있다. 따라서 미국과 서유럽을 제외한 세계 금융 시장에 돈이 말라 경제 불안을 겪고 있는 국가들의 외채 상환과 이자 지급 자금마저 부족해질 우려가 있다.

러시아 위기, 아시아에 치명타 안돼

아시아 경제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남미 경제는 러시아 위기가 아시아 경제에 미칠 영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과 무역 및 산업 연관성이 높은 중남미 경제는 러시아 위기가 제2의 아시아 금융 위기를 촉발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기류에 휩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남미에서도 특히 멕시코·베네수엘라·브라질처럼 원유와 원자재를 수출하는 국가들은 직접적으로 타격받을 전망이다.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가 원유와 원자재의 수출을 늘리면 국제 원유와 원자재 가격이 지금보다 더 떨어져 무역 수지 적자 폭을 넓힐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9년 이래 가장 낮은 원유 가격은 러시아 경제 위기를 일으킨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멕시코는 올해 원유 수출 감소분을 보전하기 위해 33억 달러가 필요하다. 멕시코 정부는 지출을 3%나 줄여야 한다. 남미 국가 가운데 촉망되던 칠레도 무역 수지 적자가 늘어나면서 주가가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세계 경제 주요 지표는, 러시아 위기가 아시아와 중남미 경제의 불안 요인이 될 수는 있어도 결정적인 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러시아가 지불 유예를 선언한 첫날 전세계 주식·외환 시장이 요동을 쳤지만 이틀 후부터 잠잠해졌다. 오히려 세계의 통화와 증시는 강세로 반전하기 시작했다. 달러당 1백47엔 대에서 저공 비행하던 일본 엔화는 러시아가 지불 유예를 선언한 이틀 후인 8월19일 도쿄 시장에서 1백43엔 대까지 수직 상승했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일본 대장성 차관이 엔화를 지지하기 위해 시장 개입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장관과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대장상은 러시아 사태와 엔화 약세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9월4일 회동할 예정이다. 미국 경제가 다소 주춤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시사저널> 제461호 64∼65쪽 참조), 무엇보다 러시아의 지불 유예 선언은 일본 엔화 약세가 세계 경제에 미칠 악영향에 대해 선진 7개국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엔화 지지 움직임이 일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엔화 가치가 회복되자 일본 닛케이 평균 주가는 2.3%, 홍콩 증권 시장의 항셍 지수는 4.2% 올랐다. 동남아시아 주가도 동반 상승했다. 아시아 통화 가치도 일제히 오름세로 반전했다. 미국 다우존스 지수도 올랐다. 그러자 러시아발 세계 공황을 주장했던 경제학자들은 어리둥절했다. 심지어 러시아 위기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독일의 마르크화와 프랑크푸르트 DAX 지수도 올랐다. 독일은 러시아에 빌려준 3백5억 달러 차관의 상당 부분을 러시아가 독일에 수출한 물품을 담보로 잡고 있다. 또 독일 은행들은 러시아 차관 상당 부분에 대해 독일 주정부의 보증을 받아놓았다. 따라서 독일 민간 은행들이 완전히 떼일 돈은 17억 달러를 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 경제 독감, 동유럽에만 전염될 듯

러시아 경제는 세계 경제에 많이 노출되어 있지 않다. 러시아 경제 위기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독일을 제외한 서유럽과 미국은 물론 금융이 불안해 어려움을 겪는 아시아와 남미 경제는 러시아와 무역 거래량이 많지 않다. DRI의 이코노미스트 파리드 아볼파디는 <시사저널>과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미국·아시아·남미의 주요 수출국이 아니고 원자재 수입국도 아니다. 또 이들 지역으로부터 러시아가 빌린 돈도 많지 않다. 따라서 러시아 경제 위기가 세계 실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세계 금융 시장은 러시아의 지불 유예 선언을 호재로 받아들이고 있다. 세계 금융 시장의 불안 요인으로 잠복해 있던 러시아 경제 위기가 완전히 노출되면서 세계 금융 시장의 흐름을 예측하기가 전보다 쉬워졌다는 것이다.

러시아 경제가 전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에 못 미친다. 따라서 전세계 교역량의 25%를 차지하는 아시아의 경제가 침체해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장과 비교할 수 없다. 러시아 경제 독감이 동유럽과 러시아 국경을 넘지 못하리라는 전망이 우세한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는 불안 심리가 확산되는 것이다. 러시아 경제 위기가 수출입 같은 세계 실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지만, 세계 금융 공황을 일으킬 분위기를 조성할 여지는 있다. 러시아에까지 확산된 세계 경제 불안 요인과 선진 경제의 활황세가 세계 경제 흐름을 좌우할 가장 큰 변수이다. 따라서 9월에 잇달아 모임을 갖는 미국·일본·중국 경제 당국자가 채택할 러시아와 아시아 경제 회복 대책과 협의 내용이 더 없이 중요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