낀세대 91학번 '맨손의 청춘'
  • 고제규·고재열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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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강경대 정국'으로 성년 맞아…
운동은 좌절, 졸업 후엔 IMF 취업난


나서거라 투쟁의 한 길로, 산산이 부서지거라, 그대 따라 이 내 몸도 투쟁의 한길로.' 대학가에서 한동안 뜸했던 '과격한' 투쟁가가 다시 울려 퍼졌다. 지난 4월19일 연세대 학생회관 4층 한켠을 차지한 20여 명이 〈투쟁의 한 길로〉 〈동지를 위하여〉 등 흘러간 운동권 가요를 열창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맸지만 투쟁가를 부르는 그들은 마치 10년 전 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단국대·명지대·동아대·전남대 등 출신 학교는 달라도 모두가 91학번이다. 단국대 91학번 이종욱씨(30)에게 오른팔을 앞으로 내뻗는 '쟁가 동작'은 그때 그 시절처럼 자연스러웠다. 이씨는 회사에서 퇴근하자마자 저녁 식사도 거른 채 연세대로 향했다. 이씨가 그곳에 달려간 것은 4월26일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잊히지 않는 '1991년 4월26일'



이씨는 1991년 4월26일을 잊지 못한다. 이 날은 국경일도 아니고 쉬는 날도 아니어서 일반인들은 쉽게 지나친다. 그러나 매년 4월26일이 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이씨는 여자 친구 생일은 잊어버려도 이 날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고 한다. 이씨에게 4월26일 하면 한 사람이 떠오른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너무나 친숙했던 이름 '강경대'.


1991년 4월26일 명지대 학생 1백50여 명은 오후 3시부터 '명지대 학원 자주화 완전승리 및 총학생회장 구출' 투쟁에 나섰다. 오후 5시까지 교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학생들은 최루탄과 화염병을 주고받는 공방을 계속했다. 오후 5시15분쯤 백골단의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다. 대학 신입생이던 강경대씨는 급히 피하다 사복조에게 붙들려 쇠파이프와 대걸레 자루, 구둣발에 짓이겨졌다. 겨우 2∼3분을 구타당한 뒤 강씨는 절명했다.


그의 죽음은 순식간에 대학가에 퍼졌다. 저녁밥을 먹다가, 술을 마시다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강씨의 죽음을 접한 학생들은 곧바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다. 시신이 안치된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은 각 대학에서 몰려든 사수대로 둘러싸였다. 이 가운데는 갓 입학한 91학번도 많았다. 그 날 이후부터 91학번들은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내 동기 강경대를 살려내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강경대씨의 죽음은 '91년 5월 투쟁'의 신호탄이었다.


성년의 날, 장미 대신 꽃병(화염병) 받아




'그 해 5월' : 91학번에게서 새내기의 낭만을 앗아간 1991년 5월 투쟁. 강경대군의 죽음으로 촉발되어 정원식 총리 달걀 세례로 마무리되었다.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박창수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정상순 김귀정. 1991년 4월 말부터 5월까지 11명의 죽음이 잇달았다. 이른바 '91년 분신 정국.' 91학번들은 이 분신 정국의 한복판에 있었다.


12년 간의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던 대학 새내기의 청춘은 91학번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잇단 죽음은 91학번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91학번은 거의 한 학기를 강의실이 아니라 거리에서 죽자살자 데모만 하며 보냈다. 책 대신 화염병과 돌을 들었고, 전투 경찰과 매일 '미팅'해야 했다. 성년의 날에도 91학번들은 선배로부터 장미가 아니라 꽃병(화염병)을 받아 들었다.


91학번들의 투쟁 열기는 다른 학번에 비해 높았다. 강경대씨 타살 정국에서 분신 정국으로 이어진 충격도 컸지만, 참교육 세대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전대협 동우회 사무처장 최현진씨(강남대 91학번)는 91학번을 '참교육 1세대'라고 정의한다. 1989년 전교조 사태 때 고 3이었던 90학번들에 비해 고 2였던 91학번이 참교육 투쟁의 전면에 나섰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학교를 떠나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91학번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데모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찍부터 자발적으로 의식화한 세대가 91학번이라는 주장이다. 전미아씨(덕성여대 91학번)도 고등학교 때 배를 곯으며 세상을 알아갔다. 전씨는 해직 교사 복직을 위해 점심 굶기 투쟁을 벌였다. "수업을 거부할 수 없어서 점심을 굶는 투쟁을 벌였다. 놀랍게도 반에서 한두 명 빼놓고 모두 참여했다."


그러나 91학번에게는 절망도 빨리 왔다. 91학번은 1991년 여름을 넘기면서 깊은 좌절을 맛보았다. 전대협·전교조·전노협·전농·전빈련 등 이른바 '5전 단체'가 주도해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를 꾸리고 투쟁을 벌였지만, 김기설씨 분신을 둘러싼 유서대필 공방과 정원식 총리 폭행 사건을 계기로 투쟁 열기는 급격하게 식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91학번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1991년 투쟁을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1991년 5월 투쟁을 기억하는 청년들의 모임'(청년모임)의 염정민씨(31)는 달걀과 밀가루를 뒤집어쓴 정원식 총리가 11인의 죽음을 눌러버린 데서 혼란의 원인을 찾는다. 1987년 투쟁은 6·29 선언이라도 쟁취했는데, 1991년 투쟁은 총리 달걀 세례를 계기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끝나버려 투쟁에 앞장선 91학번의 좌절이 깊었을 것이라고 염씨는 진단했다. 60일 동안 최루탄을 뒤집어쓴 채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를 외쳤던 구호는 말 그대로 구호로만 그친 셈이었다.


흔들리는 신입생인 91학번을 다잡기 위해 386선배들은 여름방학 동안 학습조를 꾸렸다. 거의 모든 91학번들이 이런 제안을 받았는데, 그것은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이규석씨(고려대 신문방송학과 91학번)도 선배로부터 학습을 제안 받았다. 하지만 이씨는 두말 않고 거절했다. 이씨는 하고 싶은 연극을 더 미룰 수 없었다. 그래서 이씨는 학교를 떠나 대학로 연극판을 전전했다. 반대로 하정호씨(고려대 철학과 91학번)는 이념 서적을 탐독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전은 빼지 않고 독파했다. 결국 하씨는 운동권에 빠졌다. 이씨와 하씨의 결정은 그 해 여름 91학번이면 누구나 겪은 경험이다.


운동권 마지막 세대, '서태지 세대'와 단절




그러나 운동권이든 비운동권이든 91학번에게 1991년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91학번에게 소련연방 해체는 확인 사살이나 마찬가지였다. 386세대만큼이나 91학번에게도 소련연방 해체는 당혹스런 사건이었다. 선배들로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전수 받았거나, 주체사상을 배운 91학번의 사상 기반은 총체적으로 흔들렸다.


그래서인지 유달리 1992년에 91학번 남학생들은 현실을 피하듯 군에 많이 입대했다. 문치웅씨(명지대 91학번)는 거의 운동을 접었던 친구들이 1992년에 대거 군에 입대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엑소더스였던 셈이다. 어차피 갈 것, 빨리 가자는 심사였다. 운동권에 몸 담았던 91학번은 1992년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또 한번 대거 이탈했다. 계열에 따라 NL(민족해방)은 '범민주 단일 후보' 김대중씨를, PD(민중민주주의)는 '민중 후보'인 백기완씨를 지지했으나 어느 쪽도 성공하지 못했다. 정권 교체는 물거품이 되었고, 민중 후보는 고작 1%도 획득하지 못하고 참패했다. 대통령 선거 이후 91학번 남학생들은 다시 군에 입대했다. 여학생들도 일찍 취업 전선에 합류했다.


캠퍼스는 이미 1992년 여름부터 변해갔다. 불과 1년 전까지 울려 퍼졌던 '전선에서 맺어진 동지가 있다면 바쳐야 한다. 죽는 날까지 아낌없이 바쳐라'는 투쟁가 대신 캠퍼스는 온통 '사랑을 하고 싶어, 너의 모든 향기 내 몸속에 젖어 있는 너의 많은 숨결'로 대표되는 서태지 열풍에 휩싸였다. 서태지가 등장해 본격적인 신세대 논쟁이 벌어지면서 91학번은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한 어정쩡한 학번이 되었다. 청년모임의 권경우씨(31)는 그래서 91학번을 '낀 세대'라고 표현한다. 정서적으로 운동권의 마지막 세대라고 믿고 있는 91학번은 386세대에 속하지도 못하고, 신세대인 92∼93학번 후배들과도 이념적인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학생운동이 영향력을 상실하고 개인주의 풍조가 만연한 때에 군대로 도피했던 91학번들은 1995년과 1996년 복학했다. 그런데 그때는 후배들 앞에서 '투쟁' '운동'이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대화 단절이었다. '91년 투쟁'은 가슴에 담아 두었다가 술자리에서 동기들 간에나 풀어놓을 수 있는 화두였다.


복학한 대부분의 91학번은 학점과 성적을 중시하는 대학 사회에 연착륙하기 위해 어학 연수 바람을 타야 했다. 있는 돈 없는 돈 털어서 어학 연수를 떠난 91학번은 정작 사회에 나가려 할 때 극심한 취업난에 시달렸다. 1997년 IMF 취업난의 1차 희생자는 바로 91학번 남학생들이었다.


그래서 '장수생'의 길을 택한 경우도 많다. 휴학을 거듭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해 학교생활을 오래 하기 시작한 것도 91학번이 원조 격이다. 최현진·하종호 씨가 그런 경우다. 대학원을 마치고 다시 취업 전선에 뛰어들 때 또다시 취업문은 좁아져 있었다. 지지리도 시대를 잘못 만났다는 한탄이 절로 나올 만했다.


하씨는 91학번이 사회로부터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면서, 1학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끊임없이 사회에 부대꼈다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하씨는, 그렇다고 91학번이 일방적으로 사회나 선후배들 간에 끼여 눈치만 본 것은 아니라며, '낀 세대'지만, '눈치 보지 않은 세대'라고, 말했다.


학생운동권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10년마다 세대가 구분되었다. 4·19 세대인 61학번, 긴급조치 세대인 71학번, 광주민주화운동 세대인 81학번, 그렇다면 91학번은?


지난 4월19일 노래 연습을 마치고 가진 뒤풀이 자리에서 91학번은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한가지였다. "고민이 많았던 만큼 화려하지는 않아도 자신이 발 디디고 선 곳에서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자." 어정쩡한 '낀 세대'로 남고 싶지 않은 91학번의 정체성 찾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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