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에 드러난 김준배 사망 사건의 진실
  • 고제규·차형석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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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벗은 '대선 전야 의문사'
진상규명위, 1997년 사망 김준배씨 조사 결과 발표…
프락치 공작·구타 가능성 밝혀


1997년 9월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전 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씨가 경찰 프락치 공작의 희생자였음이 최초로 드러났다. 김준배씨 사망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준배야, 이놈아!" 목이 메인 김현국씨(66)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샘이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김씨는 아들의 무덤 앞에 서자 또다시 눈물을 쏟아 냈다. 어느 때보다 서글프게 읊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4년 동안 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해온 아버지의 노력이 결국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지난 9월3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위원장 양승규)는 진정 22호 김준배씨(당시 27세·광주대 졸) 사건에 대해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발표는 부족하나마 김씨의 죽음에 얽힌 의혹을 풀어주었다.


1997년 9월15일 밤 10시 광주시 북구 오치동 ㅊ 아파트로 전남경찰청 형사기동대 2소대 소속 형사 25명이 급파되었다. 1계급 특진이 걸린 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씨의 소재가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기동대원은 김준배씨의 은신처라고 제보된 ㅊ 아파트 1308호 주변을 물샐 틈 없이 에워쌌다. 첩보 입수자 도 아무개 형사는 1308호 문이 열릴 것이며, 아파트 안에는 김준배씨를 포함해 2명이 더 있을 것이라고 기동대원에게 귀띔했다. 밤 11시 도형사의 말대로 문이 열렸고, 검거 작전이 시작되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간 기동대원은 보이는 사람을 모두 체포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김준배씨가 베란다를 넘어 텔레비전 케이블과 와이어를 타고 밑으로 내려간 것이다. 경찰은 계단을 뛰어 내려갔고, 김준배씨는 108호 화단 옆에서 발견되었다. 김씨는 의식이 불투명해 곧장 앰뷸런스에 실려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하지만 9월16일 오전 0시33분께 그는 숨졌다.


변사 사건을 담당한 광주 북부경찰서는 9월17일 사건 발생 이틀 만에 추락사로 내사 종결했다. 경찰은 13층에서 케이블선을 타고 내려가다 중심을 잃고 추락해 숨졌다고 발표했다.


이같은 경찰 발표에 유가족은 반발했다. 유가족은 체포 과정이 석연치 않고, 부검 때 발견된 오른쪽 가슴의 피멍을 들어 경찰이 구타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진 수사 방식도 수긍할 수 없었다. 국회·국무총리실·청와대로 진정서를 보내 재수사가 한 차례 이루어졌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버지 김현국씨는 만사를 제쳐놓고 아들의 죽음을 파헤치는 데 매달렸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가 국회 앞에서 4백22일 동안 벌인 농성에도 동참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위원회가 조사에 나선 지 8개월 만에 김준배씨 사건은 의혹의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경찰, 향응 제공하며 '프락치 공작'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김준배씨는 프락치 공작의 희생양이었다. 최초 첩보 입수자였던 도 아무개 형사는 특진을 노리고 사비를 털어 김준배씨 검거에 나섰다. 운동권 학생을 전담하는 보안수사대 소속이 아닌 형사기동대 소속 도형사는 1계급 특진이 걸린 김준배씨를 붙잡기 위해 공을 들였다. 김씨는 당시 한총련 의장이던 강위원씨(전남대 총학생회장)와 함께 특진이 걸린 거물급 수배자였다.


도형사는 몇달 전부터 김씨의 선배인 이민재(가명)에게 5백만∼천만 원 향응을 제공하며 환심을 샀고, 이씨로부터 김준배씨와 절친한 후배 최상도(가명)를 소개받았다. 최씨에 따르면, 도형사는 김준배씨의 은신처에 관한 첩보를 제공하면 1천5백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최씨는 조선대에 피신해 있던 김준배씨를 직접 찾아가 추석 때 자기 집에 와 있으라고 했다. 그는 김씨를 집으로 불러들인 뒤, 체포 작전이 벌어진 9월15일 밤 8시 도형사를 만나 집의 구조와 상황을 자세히 알렸다. 도형사는 형사기동대를 이끌고 김씨 검거 작전에 들어갔다. 김준배씨가 작전 도중에 숨지자 최씨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9월17일 북부경찰서에서 김현국씨를 만난 그는 "아버님 짜맞추기 수사입니다"라며 양심 선언을 할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도형사를 만난 뒤 최씨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범인은닉죄로 구속되었다가 김준배씨의 장례식이 치러질 무렵 보석으로 풀려났다.


김준배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은 프락치 공작에 대한 심증을 굳혔으나 물증을 잡지 못했다. 워낙 껄끄러운 문제였기 때문이다. "상도 역시 프락치 공작의 희생자다." 최상도씨의 절친한 친구 박경근씨(30)는 이렇게 전했다. 위원회 조사를 받으면서도 최씨는 쉽게 털어놓지 못했다. 1차 조사에서는 프락치 공작을 부인하다가 2차 조사 때부터 마음의 문을 열었다. 위원회 조사를 세 차례 받은 뒤 이민재·최상도 씨는 지난 7월7일 아버지 김현국씨를 만나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위원회는 김준배씨 체포 과정에서 경찰이 구타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새롭게 밝혀냈다. 경찰 발표와 달리 김씨는 균형을 유지한 채 마치 레펠을 타듯이 4층 아래까지 내려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곧장 떨어져 숨을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케이블선을 잡고 4층 아래까지 내려온 흔적이 있고, 발자국임이 분명한 표시가 아파트 외벽에 규칙적으로 나 있었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케이블선 감정 결과도 이를 말해준다. 위원회는 운동신경이 뛰어나 태권도 4단이었던 김씨가 4층 아래(3.6m∼4.7m) 지점에서 뛰어내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은 당시 구타 흔적이 없는 추락사로 단정했다. 하지만 위원회는 지난 2월 일찌감치 경찰이 김준배씨를 구타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현장을 목격했던 한 시민은 엎드려 있던 김씨를 발견한 경찰이 발로 밟고 경찰봉을 휘둘러 폭행했다고 증언했다. 둔탁한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강도 높은 구타였다는 것이다.


위원회는 관련자 60여 명을 모두 조사한 뒤 최초 발견자가 구타자였음을 확인했다. 혐의를 받은 이는 이영진 형사이다. 하지만 이형사는 관련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나는 억울하다. 위원회가 없는 사실을 억지로 만들어 실적을 올리려고 한다"라며 반발했다. 이씨는 자신의 실명과 사진을 공개해도 좋다며 취재에 적극 임했다. 그는 현재 변호사를 선임해 위원회에 법적으로 대응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위원회는 자신 있다는 태도다. 김준배씨의 시체에서 추락사했을 때 생기기는 힘든 이상한 상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양쪽 갈비뼈가 부러졌는데, 추락에 의해 갈비뼈가 부러졌다면 전면으로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전면으로 떨어졌다는 김씨의 얼굴에는 특별한 외상이 없다. 전면으로 떨어지지 않았는데 다른 충격이 가해져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증거이다. 또한 부검 때 김씨가 입고 있던 옷에 운동화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그 부분에 피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역시 분명한 구타 흔적이라고 위원회는 보고 있다. 그렇다고 위원회는 사망 원인을 구타라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전문가들조차 추락과 구타 가운데 어느 것이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명확히 결론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야당마저 "조용히 넘어가자"




당시 검찰과 경찰은 서둘러 사건을 종결하기에 바빴다. 얼마나 급하게 처리했던지 경찰이 작성한 보고서마다 김씨 사망의 중요한 단서인 추락 지점이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 각 보고서에 결재 난이 아예 없고, 작성자도 빠져 있어 누가 작성했는지도 모르는 실정이다. 게다가 주변의 목격자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위원회에 결정적인 증언을 했던 시민은 경찰로부터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는 전화를 받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급박하고 허술하게 수사가 진행된 이유는 무엇일까? 양승규 당시 광주북부서 형사과장은 김준배 사건이 자칫 제2의 유재을 사건이 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그 해 3월21일 조선대생 유재을씨가 시위 과정에서 숨져 장례식이 치러진 5월까지 시위가 그치지 않았는데, 대통령 선거를 불과 3개월 앞둔 상황에서 김준배 사건이 터진 것이다. 검찰과 경찰뿐 아니라 심지어 야당인 국민회의마저 조용히 넘어가기를 바랐다. 동교동 실세인 김옥두 의원이 김현국씨를 직접 만나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망월동이 아닌 장흥에 매장하자"라고 설득했다.


양승규 형사과장은 "외압은 없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한 경관은 "검사 지휘를 받아 수사했는데, 본청에서부터 사건을 빨리 종결하라고 난리였다. 변사 사건이 시국 사건으로 번질 수 있으므로 가능한 한 빨리 내사 종결하려고 했던 것 같다"라고 증언했다.


부검의 박종태 교수도 "명절에는 부검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경찰의 간곡한 요청으로 추석날 부검했다"라고 말했다. 박교수는 부검 전에 경찰로부터 한 주민이 김준배씨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는 정황 설명을 들었다. 박교수는 위원회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구타당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위원회 발표로 김준배 사건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오히려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은 형국이다(40쪽 상자 기사 참조).


위원회 조사 결과를 들려주기 위해 아들이 묻힌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은 김현국씨는 다짐했다. "네가 못다 한 길을 내가 가마." 1997년 아들을 뒤따라 가겠다는 심정으로 두 번이나 수면제를 먹은 김씨는, 아들의 뜻을 잇고자 지금 장흥군 농민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명예 회복이다." 김씨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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