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자마자 회사 가고 싶다”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2.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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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나는 일터, 행복한 직원들’ 현장 취재
"솔직히 날마다 즐겁고 신나면 그게 어디 직장입니까, 놀이터지. 하지만 아침에 눈 떴을 때 회사에 가기 싫어 미적거리는 날보다 즐겁게 이불을 박차고 나오는 날이 더 많아요.” 김영찬 과장(34·한글과컴퓨터)은 회사 가는 일이 즐겁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에서 일하다 3년 전 한글과컴퓨터로 옮겼다. 회사를 옮기면서 수입이 줄었지만 김과장은 이 회사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더 큰 기쁨을 얻었다. 일터도 즐겁고 신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한글과컴퓨터는 엄청난 흑자를 내는 회사가 아닌데도 직원들이 신명 나게 일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 10여 평 공간에 인공 정원을 꾸며 직원 휴게실을 만들어 놓았고, 헬스클럽과 탁구장도 있다. 밤새 일하는 직원을 위해서는 간식거리를 늘 준비해 놓고, 수면실을 설치했다.


‘하드웨어’에만 신경을 쓴 것이 아니다. 매달 100명이 넘는 전직원과 사장이 회사 식당에 모여 맥주 파티를 여는 등 동료끼리 정을 나누는 시간도 많다. 회사에 건의할 때마다 점수를 따서 누적된 점수만큼 상품이나 상금을 챙길 수 있는 제도도 있다. 직원을 위한 회사의 작은 배려가 회사를 신나는 일터로 여기도록 만든 것이다.


과거에는 ‘회사가 무엇을 해줄지 바라기 전에 내가 회사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부터 생각하라’는 것이 경영진의 요구였다. 그러나 요즘에는 회사가 먼저 직원에게 기쁨을 주고, 그 뒤에 충성을 요구하는 새로운 기업 문화가 싹트고 있다.


월급 외에 회사가 직원에게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선물은 직원을 위한 편의 공간이다. 편의 공간으로는 바나 카페 형태를 띤 휴게실, 운동 겸 가벼운 오락을 즐길 운동실이 유행하고 있다. 한글과컴퓨터 외에도 사내 헬스클럽을 운영하는 회사는 많다.




회사에 당구대를 설치한 회사도 있다. 홍보대행사 프레인은 직원 9명을 위해 홈바와 당구대를 갖춘 휴게실을 만들었다. 이 회사에서 포켓볼은 사장을 포함한 전직원의 오락거리이자 자연스런 대화 창구이다. 구연경 대리는 “밥이나 아이스크림 내기 당구를 치거나, 사장님이 만들어 주는 칵테일을 마시며 수다를 떨다 보면 스트레스가 사라진다”라고 말했다. 소프트웨어 개발 지원 전문 기업인 한국래쇼날소프트웨어도 바 형태 휴게실을 운영한다. 이 곳에는 음료·빵·과자·과일을 늘 준비해 놓는다.


직원을 위한 하드웨어를 완벽하게 갖춘 회사 가운데 하나가 온라인 의류 판매 회사인 하프클럽닷컴이다. (주)성도의 자회사인 하프클럽닷컴은 경기도 용인 숲속에 사옥이 있다. 수영장, 잔디 구장,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찬 야외 정원이 있는 이 회사는 전형적인 ‘전원 오피스’이다. 이 회사 직원들은 아침과 점심 시간에는 잔디 구장에서 축구 경기를 하며 친목을 다지고, 정원에서 회의를 한다. 주말에는 가족을 데려와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즐긴다. 또 카약이나 행글라이더 같은 레포츠 시설도 다양하게 갖추고 있어 직원들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다. 회식 때에는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연다.




공간과 시설 투자 여력이 없는 기업은 소프트웨어의 변화로 신나는 일터를 꾸밀 수 있다.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사내 이벤트를 기획하는 것이다. 홍보대행사 지아이지오 직원들에게 매월 둘쨋주 토요일은 ‘生土’(살아 있는 토요일)가 된다. 한 직원이 호스트가 되어 PC방이나 공연장으로 직원들을 초대한다. 경비는 회사가 지원하고, 사장을 포함한 전직원이 모여 <스타 크래프트>를 배운다거나, 공연을 본다. 3월에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관람한 뒤 공연 기획자와 함께 식사하며 토론하는 자리를 가졌다. 4월에는 마술 카페를 빌려 마술을 배웠고, 5월에는 가족과 함께 칵테일 만들기를 할 계획이다.


유급 휴가 한 달 주고 특별 보너스도 지급


한국MSD에도 ‘해피아워’라는 독특한 파티 문화가 있다. 경영진을 포함한 전직원 4백명이 매달 한 번씩 모여 흉금을 털어놓는 시간이다. 한 부서씩 돌아가면서 이 행사를 기획하고, 다른 부서는 손님이 된다. 호스트 부서는 ‘허브 100배 즐기기’ ‘재즈와 함께 하는 밤’ 등 그 달의 테마를 정하고, 행사 내용과 장소·식사 등을 준비한다. 사장과 임원이 호스트를 맡았던 해피아워 때에는 경영진이 직원에게 주문을 받아 음식을 직접 서빙하는 웨이터로 변신했다. 또 매주 금요일은 ‘가정의 날’로 정해 1시간 일찍 퇴근해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영아를 양육하는 직원은 자녀가 만 12개월이 될 때까지 하루 7시간만 근무하도록 하고 있다.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직원에게 아침을 준비해 주는 작은 정성만으로도 직원들이 회사를 즐거운 공간으로 느낄 수 있다. PTC코리아는 아침을 거르고 오는 직원을 위해 언제나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따끈따끈한 토스트와 커피, 신선한 과일만 준비해도 직원들은 하루를 즐겁고 든든하게 시작할 수 있다. 야후코리아에서는 사장이 돌아가면서 직원에게 아침을 대접한다. 사장과 직원이 1 대 1로 만날 수 있는 아침 식사 시간에는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전달하며 사장과 가까워질 수 있다.



직장인의 가장 큰 소원 가운데 하나는 ‘방학’이다. 이 소원을 들어주는 회사가 ‘TTL 광고’로 유명한 광고대행사 화이트커뮤니케이션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부터 전직원 100여 명이 1년에 한 달은 꼭 쉬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연·월차와는 별도인 유급 휴가일 뿐 아니라 특별 보너스 100%까지 더 지급한다. 처음에는 한 달씩이나 자리를 비우면 일에 지장이 생길까 봐 걱정했는데, 팀장의 공백을 신입 사원이 메워낼 만큼 스스로 책임감을 갖고 일하게 되었다. 이재갑 제작이사는 “회사가 직원을 사랑하려면 몸(돈)과 마음(시간)을 다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회사가 직원을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직원들도 열정을 갖고 일한다”라고 말했다.


‘살맛 나는 일터 만들기’는 외국계 기업이나 규모가 작은 기업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최근에는 대기업도 이 흐름에 가세하고 있다. LG카드는 올해 ‘즐겁게 일하자’는 경영 목표를 세우고, 전직원을 대상으로 한 ‘ACT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즐거운 직장 문화를 일굴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배우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직원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회사를 즐거운 공간으로 바꾸고 있다. 회사 복도에 직원 가족 사진을 붙여 놓고 평가해서 시상하는 부서가 있는가 하면, 지각상·개그상·주접상·스피드상 등 온갖 종류의 상을 만들어 모든 부서원에게 상을 주는 부서도 있다.




삼성에버랜드도 일찍부터 재미있는 사내 문화를 만들어 왔다. 이 회사에는 ‘실수한 사람을 위한 파티’라는 독특한 이벤트가 있다. 일하다 실수한 직원을 꾸짖는 대신 파티를 열어 주는 것이다. 회사는 이 이벤트를 통해 꾸중보다 칭찬이 더 큰 격려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또 독특한 아이디어를 낸 직원에게는 최고 1억원까지 포상하는 제도도 만들었다.


LG전자는 즐거운 조직 문화를 전문으로 기획하는 전담 팀을 따로 둘 정도로 신나는 일터 만들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 회사 직원이라면 언제 경영진으로부터 e메일을 받을지 모른다. 그 e메일에는 업무 지시가 아니라 ‘팀원과 함께 영화 보기’ ‘직원 아무개를 위한 깜짝 생일 파티 열기’ 등과 같은 지령이 적혀 있다. 메일을 받은 직원은 회사로부터 경비를 지원받아 지령받은 대로 해야 한다.




경쟁력 막강해져 매출·순익 ‘쑥쑥’


그렇다면 재미있고 신나는 일터들의 돈벌이 성적은 어떨까. 이들 회사는 직원에 대한 투자야말로 전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님을 확인시켜 준다. 이직률이 낮고 직원들이 열정을 가지고 일하기 때문에 매출이 매년 쑥쑥 오르는 회사가 대부분이다. 하프클럽닷컴은 회사 설립 1년 만에 매출이 10배 가량 늘었고, 광고계의 후발 주자인 화이트커뮤니케이션은 몇 년 만에 일약 선두 그룹에 올라섰다. 야후코리아 역시 인터넷 시장이 침체했는데도 전년보다 이익을 많이 냈고, 한국MSD는 연평균 200% 이상 고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MSD 이승우 사장은 “직원에 대한 작은 배려가 신나는 일터를 만들고, 신나는 일터야말로 막강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기업 경영의 새 키워드 ‘Fun’>이라는 연구 보고서를 낸 LG경제연구원 이승일 연구원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즐거운 조직’ 만들기가 기업들의 경영 모토로 자리 잡았다. 이승일 연구원은 “돈만으로 직원의 열정을 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리 기업들이 이직률을 낮추고 생산성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직원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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