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 고통 ‘원폭 후유증’침묵과 은폐의 장 막 걷는다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2.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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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진 그날 이후 57년 동안 피폭자와 그 2, 3세들이 겪은 고통은 철저히 외면받아 왔다.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사는 김○○할머니(74)는 자기가 낳고 길러온 3남1녀에게 최근 ‘친생자 포기 각서’를 써주었다. 김할머니에게서 피붙이를 앗아간 것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이다. 원폭 투하 57년을 맞는 바로 그날 대구시 남구 미군기지 앞에서 비를 맞으며 열린 반핵 집회에 생존 피폭자 1세대 50여명과 함께 참석한 김할머니는 취재진을 만나자 북받치는 설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눈물을 훔쳤다.





원폭이 투하되던 해 열아홉이던 김할머니는 히로시마 시내 한 산부인과 병원 간호사였다. 아침 일찍 의사의 지시로 급한 산모의 출산을 준비하던 중 눈앞이 번쩍하는 섬광을 보고 기절했다. 원폭의 섬광과 열선으로 왼쪽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은 김씨는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한동안 히로시마에서 머무르다 광복 후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대구에서 다시 간호사로 자리잡은 김씨는 얼마 뒤 결혼도 했다. 그러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949년에 낳은 첫딸의 허벅지에 주먹만한 혹이 생기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양성 종양이라고 했지만 간호사 김씨는 원폭 후유증이라고 직감했다. 둘째 딸 역시 마찬가지였다. 팔뚝에 주먹만한 혹이 생기고, 어릴 때부터 간기능이 약했다. 이어서 얻은 아들에게서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김씨의 남편은 아내 탓이라며 걸핏하면 구타를 일삼았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엄마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원망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김할머니는 최근 삼남매가 친권포기각서를 요구하자 이를 들어주고 연락을 끊은 채 후유증이 없는 막내딸과 살고 있다. 막내딸은 엄마를 본받아 간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큰딸이 쉰네 살이고 둘째 딸이 마흔세 살인데, 몸에 난 혹 때문에 결혼도 하지 않고 나만 원망하고 사는 것을 보면 죽고 싶다. 내가 죽기 전에 아픈 아들 딸들 데리고 일본 정부에 찾아가 건강 수첩을 받아 치료를 해주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 이렇게 말한 김할머니는 연신 그날의 흉터가 남아 있는 얼굴을 쥐어뜯으며 오열했다.



이 날 피폭자 합동 위령제에 참석한 이○○ 할머니(70) 역시 세 자녀의 건강 이상을 호소하며 눈물 짓는다. 부부가 함께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후 귀국해 사남매를 둔 이 할머니의 큰아들은 불임증, 둘째는 정신질환, 막내는 폐결핵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피폭자 1세들이 조심스럽게나마 그동안 쉬쉬해 오던 자녀들의 건강 이상 증세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대다수 피폭자들은 심한 심적 갈등을 겪는 것이 현실이다. 피폭자에 대한 뿌리 깊은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자녀들에게 어떤 불이익을 줄지 두려워해서이다. 피폭자 박○○씨는 “자식들이 나더러 ‘아부지예, 어디 가서 피폭자라 하지 마시소. 우리 결혼 안시킬랍니꺼’라고 역정을 내는 통에 지장 줄까 봐 말 몬하겠심더”라고 말했다.



방사능 유전병 탓 결혼도 못한 채 정신병 시달려






취재진은 수소문 끝에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합천 지역에서 심각한 건강 이상 증세에 시달리는 피폭자 2세 가정들을 찾아나섰다. 합천읍에서 자동차로 1시간여 달리면 나타나는 쌍책면의 한 두메 마을에는 피폭자 전○○씨(66) 가족이 살고 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취재진을 맞은 전씨는 한동안 담배 연기만 허공으로 날려보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말문을 열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원폭을 맞은 것도 모자라 멀쩡하던 자식 3명이 저렇게 줄줄이 정신병에 걸렸는지 모르겠다.” 특히 둘째 딸 ○○씨는 20년 가까이 실어증에 걸린 채 사실상 식물인간처럼 지내고 있다. 좀 나아 보이는 큰딸 ○○씨도 말을 걸어보니 정신질환 증세를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아들 ○○씨(37)마저 고교 졸업 후 같은 질환을 얻어 전씨는 삼남매를 집에서 뒷바라지하고 있다. 전씨의 부인이 근처 식당을 돌며 품을 팔아 겨우 생계를 꾸리지만 전씨마저 피폭 후유증이 심해져 중풍 증세가 나타난다고 했다. "자식들이 커가며 아무 이유도 없이 줄줄이 정신병이 생기고 보니 우리 노부부가 죽고 나면 이 애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미칠 지경이다"라며 한숨을 내쉰 전씨는 피폭자 2세가 건강 검진을 받을 길이 열려 원인을 밝히고 치료 대책이 나온다면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다고 말한다.



합천군 봉산면에 사는 최○○씨(40)도 희귀 질환에 시달리는 원폭 2세이다. 올해로 20년째 가슴에 생긴 이상한 종양을 안고 살아가는 최씨에게는 5년 전부터 마치 방사선 치료를 받은 암환자처럼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는 증세가 나타났다. 최씨의 어머니 이○○씨(64)는 히로시마에서 소학교 1학년 때 피폭되었다.



최씨가 보여준 가슴에는 손가락 굵기의 두드러기가 좌우로 줄줄이 나 있다. 대구의 한 피부과 전문 병원을 찾았더니 원인을 알 수 없는 양성 종양이라며 불편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최씨는 최근 들어 귀가 어두워지고 온몸이 가렵고 쑤시는 증상이 나타나 약을 입에 달고 살지만 차도가 없다며 괴로워했다.



8월9일 일본 히로시마로 치료받으러 떠나는 최씨의 어머니 이○○씨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피폭자 2세 중 우리 아들처럼 이상한 증상이 나타난 사람들을 정부가 나서서 정확히 원인을 조사하고 치료 대책을 마련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호소했다. 답답한 최씨는 최근 일본 원폭 전문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을 길을 알아보았지만, 일본 피폭자 2세와 달리 도움을 받을 길이 없어 발만 구르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8월9일)에 원폭이 투하되던 날 임신부의 태아를 포함해 35만 시민 중 16만명이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지거나 시커멓게 불타 즉사했다. 그 가운데 한국인은 대략 7만명이 피폭되어 4만명이 사망하고 3만여 명이 살아 남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살아 남은 사람들 중 2만3천여명이 귀국하고 나머지는 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돌아온 2만3천여명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어떤 병마와 원폭 후유증을 겪었는지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현재 국내 피폭자협회에 등록된 피폭 1세는 2천2백여명인데, 협회측은 미등록 생존자까지 합쳐서 1만3천여 명이 국내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피폭 2세는 8만명 선으로 추정된다.



정부, 원폭 피해 실태 조사 하고도 ‘쉬쉬’






이들 피폭자 2세 가운데는 앞서의 사례처럼 크고 작은 건강 이상 증세로 고통받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들을 상대로 한 제대로 된 건강 검진과 공식 실태 조사는 이루어진 적이 없다. 다만 1990년 보건사회부 산하 보건사회연구소가 실시한 원폭피해자 실태 조사 보고서에 피폭자 2세에 대한 개략적인 건강 실태 설문 조사 결과가 있을 뿐이다.



피폭 1세대 1천9백2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당시 설문 조사에서 41.1%인 7백90여명이 자녀들이 원폭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응답했다. 1자녀 후유증은 9.1%, 2자녀가 후유증을 앓는 경우는 5.2%, 그리고 3자녀 후유증은 3.1%로 나왔다. 4자녀 이상이 원폭 후유증을 앓는다고 응답한 피폭자는 무려 23.6%에 달했다. 최소한 2천3백명 이상의 피폭자 자녀가 원폭 후유증에 시달린다는 조사 결과이다. 물론 이같은 결과는 피폭자들이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발생한 ‘이상한’ 증상들을 주관적으로 원폭 후유증이라고 단정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방사선 유전 증세라고 단정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기초 조사만으로도 피폭자 2,3세들의 건강 실태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당시 조사 이후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입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모두가 쉬쉬하던 피폭자 2,3세의 건강 실태에 대한 진실이 공개된 것은 지난 3월22일 한 피폭자 2세가 커밍아웃을 하고서부터였다. 부산에 사는 김형률씨(33)가 자신이 앓고 있는 ‘면역 글로블린 결핍증’이 피폭자인 어머니와 연관된 방사능 유전병이라며 한·일 양국 정부를 상대로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던 것이다.



원폭 투하 57주년 기념일이던 8월6일 피폭자 2세 김형률씨는 부산대학교 도서관을 뒤지고 있었다. 이날 밤 취재진과 만난 김씨는 비쩍 마른 몸매에 연신 자지러질 듯한 기침을 해대는, 누가 보아도 한눈에 심하게 기관지 질환을 앓는 환자였다.


유전학 관련 국내외 문헌과 자기 병에 대한 의사의 연구 논문 등을 펼쳐가며 방사선 유전병이라고 한참 설명하는 김씨는 이미 그 분야에 `‘박사’가 되어 있었다. “피폭자 어머니를 둔 내 병은 문헌상 X염색체 열성 유전에서 비롯한 유전병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숨기기 급급했을 자기의 특이 질병을 김씨가 이렇듯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나선 데는 까닭이 있다. “나는 지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다. 아무도 내 병의 원인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도 진실을 밝히는 것은 비슷한 원인으로 병을 앓고 있는 피폭자 2세들의 건강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서이다.”



‘커밍아웃’ 피폭 2세대들, 진실 규명 나서






김형률씨가 자기의 병이 방사선 유전으로 생겼다는 단서를 잡은 때는 1995년 병상에서였다. 부산의 한 종합병원에 입원해 검사와 치료를 받던 김씨의 희귀 질환은 의료진에게도 연구 대상이었다. 피폭자 어머니를 둔 가족력과 김씨 질환의 상관관계에 주목한 의료진은 연구를 통해 <면역 글로블린 igM의 증가가 동반된 면역 글로블린 결핍증 1례>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의학계에 보고했다. 당시 연구를 수행한 부산 침례병원 황순철 호흡기내과과장은 “가족력에 피폭자가 있어 김형률씨의 질병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냈다. 유전적 원인 여부를 더 확실히 밝혀내려면 유전학 분야에서 전문적인 추가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자기 질병의 단서를 찾아낸 김씨는 이후 번민에 휩싸였다. 피폭자 유전병 문제를 스스로 제기한 경우가 아직까지 한·일 양국에 없었기 때문이다. 건강한 다른 형제들과 전국의 피폭 2세들에게 미칠지 모를 부작용도 염려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상의한 끝에 자기의 병을 세상에 드러내기로 결론지었다. 아버지 김봉대씨는 “아들의 병이 방사선 유전과 연관이 있다면 개인적인 병이라기보다 국가 대 국가의 범죄에 의해 생긴 병이고, 그 책임도 일본 정부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지난 3월22일 대구에 있는 ‘원폭 피해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통해 자기가 앓고 있는 피폭자 2세 유전병을 처음으로 드러낸 김씨는 이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김씨는 지난 5월23일부터 1주일간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일본 시민회’를 찾은 김씨의 사연은 일본 언론에도 널리 보도되었다. 한·일 피폭자의 교류와 연대사업을 펴오고 있는 후지와라 유코쿠 회장은 “자기 병에 관한 한글 소견서를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해 들고 일본을 찾아와 책임을 따지는 김형률씨의 열의가 일본에 알려지면서 일본인들 사이에 협력 태세가 갖춰지고 있다”라고 밝혔다.



김씨는 나가사키 피폭 기념일인 8월9일 일본을 다시 방문했다. 일본 원폭단체들이 김씨의 유전병에 대해 히로시마 대학 의학부 혈액내과에서 정밀 진료를 받도록 주선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진료를 마치고 귀국하는 대로 김씨는 고통을 삭인 채 숨어 지내는 전국의 피폭자 2,3세 중 환자들을 규합해 ‘피폭자 2세 환우회’를 결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같은 김형률씨의 커밍아웃 활동은 한·일 양국 피폭자 2세 운동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한국의 ‘피폭자 2세회’(회장 이승덕)는 전국적으로 일부 건강한 피폭자 2세 8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친목 활동을 벌이고 있다. 부산에 거주하는 피폭자 2세회 이태재 부회장은 "김형률씨의 커밍아웃을 계기로 지난 8월3일 전국 피폭자 2세회 대표 6명이 부산에서 모여 환자 실태 파악과 지원 활동을 강화하고 피폭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 운동을 펴기로 결의했다"라고 밝혔다(41쪽 딸린 기사 참조).



하늘에서 원자폭탄이 터져 수백 가지 방사성 물질이 두 도시를 뒤덮은 그날 이후 57년 동안 피폭자 2,3세들이 겪어온 건강상의 고통은 ‘원인 불명’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철저히 외면받아 왔다. 여기에는 피폭자와 그 가족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도 큰 몫을 했다. 그러나 이제 피폭 2세 당사자들이 침묵과 은폐를 딛고 진실을 찾아 일어서려 하고 있다. 정부와 국민이 원폭 피해자와 그 후손의 참화와 고통을 나누어 지기 위해 이들의 호소에 화답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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