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부산→B USAN 해양 수도로, 아시아 허브로
  • 부산 ·이문재 편집위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2.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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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이 열리는 동안, 아시아의 수도는 부산이었다. 서쪽 베이루트에서 동쪽의 도쿄, 북쪽 베이징에서 남쪽 자카르타에 이르기까지 37억 아시아인들은 시계 바늘을 부산 현지 시각에 맞추었다. 신의주 경제특구 소식과 함께 평양 응원단이 부산 땅을 밟으면서 아시안게임은 ‘최초의 전국 체전’이자 전세계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경기장을 짓고, 도로와 터널을 뚫는가 하면, 교량을 세우며 7년을 준비해온 부산은 지금 두 팔 벌려 아시아를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잔치는 곧 끝난다. 축제가 성대할수록 그것이 끝난 자리는 더 허전하기 마련이다. 몇년 전부터 2002년을 제2의 개항 원년으로 삼아온 부산이 감당해야 할 ‘축제 후유증’은 그래서 더 클지도 모른다.



해양 수도와 아시아의 허브를 꿈꾸고 있는 부산. 하지만 부산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면, 그 속내는 그리 편치 않다. 4·19와 부마 민중항쟁으로 대표되던 정치적 자존심과 조국 근대화의 엔진이었다는 경제적 자부심은 1980년대 이후 급속하게 희미해졌다. 제2의 도시에서 ‘지방 도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시사저널>은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직전인 9월27일부터 금메달이 막 집계되기 시작하던 10월2일까지, 부산의 기억인 ‘40계단’에서 부산의 새로운 상징 광안대교, 그리고 부산의 미래인 가덕도 신항만을 둘러보았다. 2002년 10월 부산은, 釜山(식민화)에서 부산(근대화)을 통과하며 BUSAN(세계화)을 지향하고 있었다.






한산하다 못해 적막했다. 아시안게임 개막을 이틀 앞둔 지난 9월27일 저녁 8시께, 연제동 부산시청에서 서면을 거쳐 부산역, 국제시장 앞에 이르는 거리는 아시안게임 개최지의 ‘중앙로’가 아니었다. 아치는커녕 현수막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부산역 앞에는 가로등조차 꺼져 있었다. 가로등에 세로로 걸려 있는 휘장과 일부 택시가 달고 있는 흰 깃발이 겨우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서울의 방송과 신문이 연일 내보내던 아시안게임 관련 기사가 무색했다. 아시안게임 개막 나흘을 앞두고 개관한 부산홍보관에서 본 ‘다이내믹 부산, 아시아의 허브’라는 시각 이미지도 공허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변화요? 변화는 무슨 변화.” 이 날 오후 부산시청을 찾았을 때, 기자의 질문에 대한 공무원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냉소적이었다. 부산의 지식인·시민운동가 들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기자처럼, 최근 2~3년 동안 부산을 찾지 않았던 외지인들이 보기에 부산의 변화는 ‘천지개벽’으로 보인다.



해운대 센텀시티에서 남선동 49호 광장을 연결하는 광안대교가 건설되었고, 백양산 터널·수정산 터널과 더불어 제3 도시고속도로가 뚫렸는가 하면, 구포에서 해운대에 이르는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었다. 수영강변도로 완공에 이어, 가야로와 거제로가 확장되고 있고, 사직동-초읍간 도로와 남항대교가 공사 중이다.



부산의 외모는 분명 변하고 있다. 부산시에 따르면, 지난 7년 간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을 위해 부산시가 사회간접자본(SOC)에 투자한 금액은 모두 6조6천1억원. 이 가운데 1조9천36억원이 직접 투자였다. 부산시는 아시안게임이 부산의 발전을 10년 이상 앞당길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부산의 외형적 변화에다 아시안게임 개최가 가져올 다양한 효과, 그리고 부산시가 내놓고 있는 청사진들을 겹쳐놓으면, 부산의 미래는 손에 잡힐 듯하다. 신의주 경제특구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 바로 부산이다. 부산은 경의선 철로를 통해 신의주를 거쳐 유럽 대륙까지 연결된다. 일본은 해저 터널을 통해 경의선에 승차하려는 계획을 이미 세워놓고 있다(50쪽 상자 기사 참조). 뿐만 아니다. 부산역이 부산항 및 김해공항과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스리 포트 시스템(three port system)’을 실현한다면, 부산은 명실상부한 동북아의 중추 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외모와 부산 사람들의 표정은 왜 일치하지 않는 것일까. 9월28일 오전, 북한 응원단을 태운 만경봉 2호가 다대항에 닻을 내릴 즈음, 낙동강변을 거슬러 부산대로 달려갔다. 이왕주 교수(부산대·철학)는 “부산에서 유럽컵 축구대회가 열렸다면 시끌벅적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견주면 아시안게임은 ‘촌스럽다’. 이교수에 따르면, 아시아가 서양 문화의 식민지로 전락한 나머지, 아시아 스스로 아시아적 가치를 경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날 저녁, 기자는 운좋게도 부산에 살고 있는 부산진고 7회(1978년 졸업) 동기생들의 모임에 끼일 수 있었다. 권기철(부산외대·경제학) 배병삼(영산대·한국정치사상) 배정한(영남대·무역학) 교수, 이영우씨(중앙고 국어교사) 등 6명이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였다. 제철을 맞은 전어회를 앞에 놓고 ‘C1소주’를 권커니 잣거니 하는 동안, 동기생들은 영화 <친구>의 ‘친구’ 사이로 돌아가 있었다.





지식인들 “올해는 탈 서울 원년”



‘함께 있는 동안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던’ 부산진고 ‘친구’들은 어느새 40대 중반. 그들은 부산의 엄연한 오피니언 리더들이었지만, 화제는 어느새 어두워졌다. 이 날 오전, 이왕주 교수가 지적했듯이 부산이 겪어온 현대사는 국내 어느 지역 못지 않은 비극이었다. 조선시대 동래군이 갖고 있던 혁혁한 전통은 일제에 의해 절맥되었다. 동래군이 부산포에 합병된 것이다. 이후 피난 수도를 거쳐 4·19와 1979년 부마항쟁을 거치며 키워온 정치적 자존심은 1987년 6월항쟁을 정점으로 무력해졌고, 대신 서울 콤플렉스가 스며들었다.



부산진고 동기생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에 대한 열등감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서울과 함께 성장 억제 도시로 지정되면서 부산은 급격하게 몰락했다. 부산진고 동기생들의 서울 중심주의 비판은 신랄했다. “요즘 서울에서 강북을 강남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있는데, 그럼 지방은 어떡하겠다는 것이냐.” “명절 때마다 매스컴에서 귀경길, 귀경길 하는데, 그게 왜 귀경이냐, 귀가지.”



아파트값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날 모인 한 ‘친구’는 1980년대 후반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고향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5년. 현재 그가 사는 해운대(부산의 새로운 고급 주택지다) 31평짜리 아파트는 1억5천만원인데,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 25평짜리는 6억원으로 변해 있었다.



다섯 배 이상 차이가 나는 아파트 가격이 서울과 부산 사이의 격차를 압축하고 있었다.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서울 본사와 부산 지사, 서울 지역 대학과 부산의 ‘지방 대학’, 서울 문화와 부산 문화 등 모든 부문에 걸쳐 부산은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다. 부산시는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올해를 ‘제2의 개항 원년’으로 삼고 있지만, 부산의 지식인들은 ‘탈 서울 원년’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부산의 냉소, 즉 피해 의식의 한 원인으로 보였다.



서울과 부산의 현격한 차이 앞에서 지방 정부 공무원이나 지역 기업인, 시민운동가는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공통된 인식이다. 분권화도 형식적이라는 비판이다. 부산시의 한 공무원은 “복잡한 업무만 이양했지 권한과 재정, 인력은 중앙 정부가 그대로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부산경제가꾸기시민연대 김희로 공동대표는 “지방에서 세금을 거둬가는 중앙 정부가 지방을 지원할 때는 선심을 쓰듯이 한다. 현재 7 대 3인 국세와 지방세 비율로는 지방 정부가 자립하기가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1980년대 이후 부산은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라는 조용필의 노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95년 가덕도 신항만 건설 공사가 시작되고 1999년 녹산공단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부산은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2000년, 외환위기 이후 애물로 전락했던 삼성자동차가 르노삼성자동차로 거듭나고, 같은 해 부산영상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부산은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20년간 ‘돌아와요 부산항에’ 외쳤지만



부산은 20년 가까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외쳐왔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경공업 위주의 산업은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급격하게 선회했지만, 부산은 정부의 성장 억제 정책에 발목이 묶였다. 도심에 있던 공장들이 이전되었다. 1980년대 이후 부산은 기업 하기 좋은 도시가 아니었다. 생산 시설이 빠져나가자 인구도 줄어들었다. 1991년 3백89만명으로 절정에 달했다가 이후 답보 상태이다. 2000년 현재 부산 인구는 3백81만명. 전국 인구의 8.1%를 차지하고 있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본격 실시되면서 부산은 ‘마지막 안간힘’을 다했다. 그 성과 가운데 하나가 1998년에 수립된 21세기 부산 경제 성장을 위한 10대 전략산업 육성 계획이다. 항만 물류·관광·금융·소프트웨어·영상 산업을 성장 유망 산업으로, 자동차·부품, 조선·기자재, 신발, 섬유·패션, 수산·가동 산업을 구조 고도화 산업으로 지정한 것이다.



신항만 건설(48~50쪽 딸린 기사 참조)과 더불어 르노삼성차는 부산 경제의 오늘이자 내일이다. 자동차 1대를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부품은 2만여 개. 철강 기계 전자 전기 화학 섬유 등 산업 전반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고용 증대도 무시할 수 없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울산 근로자의 37.7%를 흡수하고 있다. 르노삼성차 공장이 인접해 있는 녹산공단에는 2000년 말 현재 2백5개 업체가 가동되고 있다.



제2의 개항 원년에 대한 부산의 의지를 내장하고 있는 거점들은 또 있다. 국내외에 부산의 문화적 이미지를 새롭게 각인하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말고도, 부산무역전시관(BEXCO)이 한몫을 하고 있다. 부산 컨벤션 산업의 센터인 벡스코는 지난해 부산국제모터쇼를 유치하면서 문을 열었는데, 11개국 2백7개 업체가 1천4백개 부스를 마련해 72만 관람객을 끌어들였다.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에 이어 펼쳐지는 두 가지 국제 행사도 부산의 야심 찬 기획이다. 10월17일부터 열리는 2002부산합창올림픽. 문화올림픽이라고 불리는 이 합창 대제전에는 40여 나라에서 1만2천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10월26일에는 ‘평등을 향한 힘찬 도전’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건 제8회 부산 아·태장애인경기대회가 개막된다. 11월14일에는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축포를 터뜨린다.



종반에 접어든 아시안게임은 스타를 배출하는 감동의 무대이기도 하지만, 부산의 역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마당이기도 하다. 경기장과 선수촌 곳곳에서 운영의 미숙함이 드러났다. 포스트 아시안게임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은 ‘과연 해냈구나’와 ‘결국 이 정도인가’라는 극단적 평가 사이에서 수립될 것이다.



부산시청 정진학 경제기획담당은 이번 아시안게임의 최대 성과가 부산의 브랜드 이미지를 널리 알린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긍정적 성과에 초점을 둔다면, 부산이 가진 피해 의식은 한층 줄어들 것이다. 선물거래소를 유치하고, 부산항만공사(PA)를 출범시키는 과정에서 쌓인 자신감이 새로운 추진력을 얻는 것이다.





경제 비전만큼 중요한 ‘부산학’ 정립



아시안게임의 대차대조 결과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가’라고 정리된다면, 부산은 다시 한번 주저앉을지도 모른다. 자본과 기업, 인재와 재정을 빼앗기고 있는 ‘지방 도시의 울분’을 또 한번 반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뼈아픈 자기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탈 서울’은 불가능하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중앙과 지방 사이의 격차는 서울과 부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 전체가 안고 있는 절박한 현실이다. 부산의 지식인과 시민단체들은 더 이상 지역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된다며,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만이라도 정치색을 배제하고 지역에 거주하는 인물을 선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문학자들은 부산의 경제 비전도 중요하지만 ‘부산학’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른바 부산의 정체성을 토대로 해양 수도를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산대 배병삼 교수는 부산 사람은 폐쇄적이면서도 의외로 개방적이라고 말한다. 아시안게임 직전 부산에 도착한 미얀마 선수단은 부산 서포터스의 환대에 눈물을 흘렸다. 부산 사람들은 개항 이래 특유의 손님맞이 문화를 이어온 것이다.



서울에 대한 분노와 동경이라는 이중성과 뒤얽혀 있는 부산의 개방성이 포용성으로 발전한다면, 제2의 개항 원년에 대한 안팎의 신뢰는 한층 높아질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서울(중앙)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직접 세계와 손을 잡겠다는 ‘부산 독립’이 말 그대로 10년 이상 앞당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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