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커닝’ 마음먹으면 다 된다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r)
  • 승인 2004.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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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80명이 넘는 고등학생들이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이용한 부정 행위를 저질렀다. 이들 디지털 키드의 도발 앞에 아날로그 기성 세대는 속수무책이었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시험 당일 경찰이 ‘커닝 지휘본부’
지난 11월17일 밀양경찰서 정보과 한정민 주임(경위)은 광주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이 날 고시 공부를 하는 친구를 만나러 광주시 용봉동 전남대학교 농대 근처 고시촌을 찾아갔다.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마음으로 고시촌에 도착한 한경위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친구가 묵고 있던 ㅎ고시원 앞에 고등학생 30~40명이 떼를 지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도 수상했다. “아이 씨. 커닝 좀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 “너무 손발이 안 맞았어. 힘들어.”

11월17일은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비록 휴가중이었지만, 한경위는 형사 특유의 직감으로 집단 커닝이라고 의심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경위의 고시생 친구 왈 “오늘 하루 종일 1, 2층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났다. 숫자 1부터 5까지를 난수표처럼 부르는 소리였다”라는 것이다. 한경위는 즉각 관할서에 ‘통신 장비를 이용한 수능 부정 행위가 진행되고 있다’고 신고했다.

한경위가 목격한 장면은 바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규모 집단 수능 부정 사건의 현장이었다. ㅎ고시원은 1백8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연루된 휴대전화 커닝 작전의 ‘지휘본부’였던 것이다.

부정 시험 당일 현장을 목격한 경찰이 있었고, 그가 동료 경찰에게 신고까지 했다는 사실은 <시사저널>이 처음 밝힌 것이다. <시사저널>은 현장 취재를 통해 11월17일 ‘커닝 지휘본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광주 북부경찰서가 한경위의 신고를 접수해 역전지구대에 출동 명령을 내린 시각은 오후 6시13분이었다. 이후 경찰 2명이 현장에 도착한 시각은 6시18분. 경찰은 ㅎ고시원 1층과 2층을 둘러보며 문제의 괴성이 들렸던 방 2~3개를 조사했다. 그러나 이들은 ‘증거가 없다’며 그냥 되돌아갔다.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박 아무개 경사는 기자에게 “이미 학생들이 방을 비운 후여서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수능 종료 시각은 6시15분이었다. 경찰 말대로라면 단 3분 차이로 학생들은 현장 검거 위기를 모면한 셈이다.
ㅎ고시원 고시생들에 따르면, 경찰이 철수하는 그 순간까지 고시원 마당과 주변 골목에는 학생 30~40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은 이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박경사는 “휴대전화 부정이라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나. 고시원 관리인이 ‘수능 응원하러 후배들이 모여 있다’고 설명하기에 그런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 만약 내부 고발자가 없었다면 수능 커닝 작전은 현장 출동 경찰까지 농락한 완전 범죄가 되었을 것이다.

커닝 지휘본부인 ㅎ고시원은 주로 전남대학 학생들을 받는 곳이지만, 지역 고등학생들도 방을 얻어 살곤 한다. 방값은 한 달에 19만원인데, 방 하나의 크기는 겨우 1.5평이었다(사진 참조).

3~4개 조직으로 나눠 부정 저질러

ㅎ고시원 고시생 ㅇ씨(34)는 그날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침 일찍부터 유난히 아래층이 시끄러웠다. ‘5, 1, 3, 4’ 이런 식으로 숫자를 호명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동네에 다 들릴 정도로 소리가 컸다. 점심 때 잠깐 쉬더니 오후에 다시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ㅇ씨는 너무 시끄러워서 아예 창문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괴목소리의 정체는 부정 행위를 돕는 고등학교 2학년생 도우미들이었다. 이들은 ‘우등생 선수’들의 답안을 문자 메시지로 받아 정리하고 다시 ‘구제 대상 선수’들에게 재전송하는 일을 했다. 홀수 시험지 답안을 정리하는 조와 짝수 문제지 답안을 정리하는 조가 방을 따로 쓰고 있었다.

고시원 관리인은 당시 정황을 묻는 기자에게 “난 그냥 방 2개를 빌려줬을 뿐이다. 더 묻지 말라”며 답변을 피했다. 광주 동부경찰서는 ㅎ고시원을 무대로 한 조직의 도우미가 37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는 여러 고시생 목격자들의 진술과 일치한다. 도저히 방 2개에 들어갈 수 없는 인원이다.

전남지방경찰청에 따르면 11월29일 현재 휴대전화 수능 부정 행위에 연루된 광주지역 학생은 1백83명이다(25쪽 표 참조). 이 중 1백27명이 수능시험장에서 직접 부정 행위를 한 수험생이며, 46명은 문자 메시지 도우미 노릇을 한 후배들이다. 그 밖에 도우미 관리 역을 맡은 대학생 9명과 통장 관리를 도운 1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크게 3~4개 조직으로 나누어 활동했는데 그 중 1백51명 가량이 참여한 제1 그룹이 핵심이었다. 나머지 그룹은 제1 그룹으로부터 답안을 받아서 재전송하는 방식을 썼다. 제1 조직은 50만~70만 원, 제2 조직은 10만~30만 원씩 모아 작전 비용을 댄 것으로 밝혀졌다. 구속된 학생은 11월29일 현재 14명이다. 대리 시험 연루자 2명을 제외한 수치인데, 경찰 조사가 확대되면서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11월27일, 부정 시험에 연루된 일곱 학교 가운데 하나인 광주 ㅈ고등학교를 찾았다. 이 학교는 부정 연루 학생이 최소 33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교장은 “초상집에 와서 왜 자식이 죽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겠는가”라며 인터뷰를 피했다. 하교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대부분 “학교에서 입단속을 하고 있어요. 기자 만나면 안돼요”라며 피했다. 그러나 자신을 2학년이라고 밝힌 한 학생은 “수능 며칠 전부터 이미 소문이 다 나 있었어요. 나는 선배들과 별로 친하지 않아 도우미로 안 찍혔나 보죠”라고 말을 받았다. 선배가 부정 행위를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어쩔 수 없죠. 시키면 해야지…. 후환이 두렵잖아요.” ㅈ고 학생들은 일부 언론이 보도한 ‘일진회 주도설’에 대해 “일진회라고 불릴 만한 거창한 조직은 아니고 그냥 끼리끼리 잘 노는 그룹이 있는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교사들, 수능 감독 기피

수능시험 감독관들은 왜 휴대전화 커닝을 그 자리에서 막지 못했을까? 보통 수능시험장에서는 고교 교사 2명(과목 수가 많은 4교시만 3명)이 교실 앞뒤에 서서 감독을 맡는다. 지난 11월17일 수능 때 교실 감독을 했다는 광주 지역 김 아무개 교사(34)는 이렇게 상황을 설명한다. “시험이 시작되면 감독 교사는 발자국 소리 내는 것조차 조심해야 한다. 시험 분위기를 망친다고 항의하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는 학생이 있어도 그 옆에 서서 경고만 할 뿐이다. 현장에서 바로 실랑이를 벌일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교사들이 시험 감독을 기피한다. 그러다 보니 대개 연배 순으로 20대 어린 교사가 교실 감독을 하게 된다. 올해는 중학교 교사의 지원이 없어서 나까지 현장에 가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남들 다 했는데 광주에서만 걸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광주지부 수석부지부장 김택중 교사는 “감독관의 역할 가운데 부정 행위 방지는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안정된 분위기에서 편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게 유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부정 시험의 원인에 대해 “단 한 번의 시험이 인생을 좌우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낳은 예견된 사고다. 감독을 강화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입시 체계 전반을 바꿔야 풀 수 있는 문제다”라고 말했다.

김택중 부지부장은 “이번 사건을 광주라는 지역 문제로 환원하면 안된다”라면서 민주노동당 박용진 대변인의 광주 폄하 발언을 비판했다. 박용진 대변인은 수능 부정 사태를 ‘광주학생의거’ ‘남총련’ 등에 비유했다가 물의를 빚었다. 김택중 교사는 직접 박용진 대변인에게 항의 전화를 했다고 한다. 박대변인은 결국 11월29일 사의를 표했다.

광주 시민은 행여나 부정 시험 파문이 광주 출신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주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지역 방송과 지역 신문은 연일 광주의 이미지가 흐려지고 있다며 걱정하는 민심을 전달했다. 택시 운전을 하는 김재혁씨(43)는 “광주 학생들만 커닝을 했겠냐. 남들도 다 했는데 재수 없게 여기 학생들만 걸렸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11월26일 아침 광주 동부경찰서에는 일찍부터 고등학생 20여 명이 친구들 면회 신청을 하러 몰려나와 있었다. 어머니와 누나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날 오전 9시30분께 부정 시험을 주도한 학생 6명이 검찰에 송치되었다. 피의자 6명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얼굴을 감춘 채 급히 호송차에 올랐다. 친구들은 호송차 창문에 손바닥을 두들기며 창문 구멍 사이로 “조심해라” “잘 지내라”고 외쳤다. 차가 사라지자 학생들은 “쳇, 얼굴도 안 보이네”라며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그 중 한 명에게 누굴 만나러 왔느냐고 묻자 ‘중학교 친구’라고 답했다. 주로 광주 ㅈ중학교 출신이 이번 부정 행위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들은 휴대전화라는 디지털 세상에 살면서도, 동기 동창·선후배라는 아날로그 문화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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