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 위기 ‘낙엽줄’쓸어내나, 주워담나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5.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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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 실업이 본격화하면서 40~50대 명퇴자들을 위해 국민은행 등이 실험적으로 시행하는 ‘일자리 나누기’의 성패가 주목되고 있다.
낙엽줄. 한 방송사 오락 프로그램에서 유래한 신조어다. 인생의 순환 주기상 새싹(유년)-이파리(청년) 단계를 지나 낙엽 단계에 접어든 중장년층을 일컫는 조어가 바로 낙엽줄이다.

신년 벽두부터 낙엽줄을 겨냥한 공습 경보가 잇달아 발동되고 있다. 지난 1월 말 대규모 구조 조정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국민은행은 1단계 조처로 정규직 2천2백명에 대한 명예 퇴직을 단행했다. 국민은행은 또 비정규직에 대한 구조 조정을 지속적으로 병행해 올 한 해 총 4천여명을 감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뒤를 이어 우리증권·조흥은행·외환은행 등 금융 기관뿐 아니라 코오롱·포스코 등 민간 기업도 인력 감축 계획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이같은 구조 조정의 칼바람 속에서 낙엽줄은 말 그대로 추풍낙엽 신세다. 물론 구조 조정에 낙엽줄만 희생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은행의 한 과장은 “30대 중반 젊은 과장급들도 명퇴(명예 퇴직) 대상자가 돼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았다”라고 회사쪽 분위기를 전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나이 많은 낙엽줄이 명퇴 1순위가 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민은행측은 나이 외에도 영업 실적·인사 고과 등을 두루 감안했다고 밝혔지만, 이미 명퇴 실시 전 은행측이 작성한 대상자 명단에는 40~50대 점포장급만 4백여 명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나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추풍낙엽’ 신세
‘낙엽줄=퇴직 1순위’는 비단 국민은행에서만 통하는 등식이 아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00~2002년 명예 퇴직을 실시한 적이 있는 사업체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명퇴자 선정 기준은 근속 연수(68.4%) > 나이(55.5%) > 성별(21.9%) 순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정희 조사관에 따르면, 이는 명백한 차별이다. 1967년 연령차별금지법을 제정한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연령을 기준으로 한 해고가 범법 행위이다. 기업체들도 이를 안다. 그렇지만 기업체 인사 담당자들은 공공연히 말한다. “그래도 나이대로 자르는 게 가장 뒤탈이 없다”라고.그럼에도 국민은행이 이번에 주목되는 이유는 ‘낙엽줄 쓸어내기’와 더불어 ‘낙엽줄 구하기’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했기 때문이다. 낙엽줄 쓸어내기는 이미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 일반화한 관행이다. ‘사오정’(45세 정년)이니 ‘상시적 구조 조정 시대’라는 살벌한 용어를 직장인들은 이제 체념으로 받아들인다.

구조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국민은행은 ‘자해성’ 홍보도 서슴지 않았다. 명퇴를 앞두고 국민은행이 배포한 보도 자료를 보면 ‘국민은행은 대규모 적자에도 불구하고 잉여 인력이 유지돼 1인당 생산성이 가장 낮은 은행’이며 ‘금융감독원 평가 결과 자산 건전성 부문은 4등급에 가까운 3등급, 수익성 부문은 시중 은행 중 최하위 수준인 4등급을 받았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경쟁사가 뿌린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이런 분위기에 일부 명퇴자들은 순순히 낙엽줄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김종익 전 국민은행 영등포지점장은 명퇴를 앞두고 사내 게시판에 자신의 심경을 밝히는 글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김씨는 정든 직장을 침몰해 가는 타이태닉호에 비유하며, 직장에서 ‘노블레스’를 누렸던 사람으로서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길을 택하겠다고 밝혔다. 타이태닉호의 일등실 승객들이 여자와 어린이를 위해 구명 보트를 양보했듯 자신 또한 승객 초과로 침몰 위기를 겪고 있는 국민은행 호를 위해, 그리고 ‘계약직 사원과 만년 차장·과장으로 생활하는 후배들’을 위해 구명 보트를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반면 구차하더라도 끝까지 들러붙는 쪽을 선택한 낙엽줄도 있었다. 은행을 떠난 선배들로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온 말, 곧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악착같이 버티라’는 말을 이들은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버티려는 낙엽줄에 맞서 은행측도 초강수로 나왔다. 일종의 ‘젖은 낙엽 떨구기 작전’이 개시된 것이었다.
국민은행은 명퇴 신청이 마감된 다음날인 2월1일, 명퇴 대상자이면서도 명퇴를 신청하지 않은 직원 2백58명을 업무추진역·상담역 같은 후선 업무에 배치했다. 은행권에서 후선 배치자는 통상 강제 퇴출 1순위로 꼽힌다. 후선으로 밀려나면 당장 임금이 82% 수준으로 떨어지고, 잘해야 2~3년 버티면 고작이다. 결국 이렇게 후선으로 밀려난 이들 중 상당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뒤늦게 명퇴를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무자비한 조처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국민은행측은 이번 명퇴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어느 기업에서도 실시해 본 적이 없는’ 파격적인 지원 제도들을 도입했노라고 호언했다. 실제로 국민은행은 명퇴자들에게 명퇴금을 더 얹어 주고 공로패를 안겨 주는 식의 ‘당근’을 제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물론 이 당근은 예사 당근이 아니다. 국민은행 명퇴자들은 24개월치 월급에 해당하는 특별퇴직금을 일시불로 지급받았다. 주식도 2백 주씩 받고, 자녀 학자금도 지원받기로 했다. 이 때문에 법정 퇴직금도 챙길까 말까 한 중소기업 근로자들은 국민은행 명퇴를 ‘럭셔리 명퇴’라고 비아냥댄다.

그러나 이를 떠나 국민은행이 새로 도입한 제도의 핵심은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낙엽줄 구하기’로 요약할 수 있다. 지난 1월 중순,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국민은행 본점 12층에는 ‘직원만족팀’이라는 신생 팀이 새로 입주했다. 명퇴를 앞두고 노사 합의로 만들어진 이 팀은, 퇴직한 직원들의 전직(轉職)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전직 지원 제도. 일명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라고도 불리는 이 제도는 국민은행이 처음 도입한 것은 아니다(58~59쪽 딸린 기사 참조). 그렇지만 국민은행이 실시하고 있는 전직 지원 제도는 다른 기업과 차원이 다르다고 강진섭 직원만족팀장은 강조했다. “기존 전직 지원 제도는 사람을 그냥 내몰기 미안해 구색 맞추기용으로 실시한 측면이 강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퇴직자의 삶의 틀이 가급적 망가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전직 지원 제도를 실험해 보려 한다.”

그러자면 퇴직자들의 창업이나 재취업을 돕는 것은 기본이다. 국민은행은 여기서 나아가 이번 명퇴자들에게 신규 일자리를 제공하기로 했다. 일단 국민은행 행우회가 전액 출자한 주식회사(가칭 ‘KB동산’ 혹은 ‘KB한마음’)를 세워 여기에서 명퇴자들을 대거 고용하기로 한 것이다(58~59쪽 딸린 기사 참조).

국민은행이 이를 통해 ‘구제’하고자 하는 실직자의 폭은 예상 외로 넓다. 직원만족팀은 2월14일 현재 이번 명퇴자 2천2백 명 중 절반 가량인 1천1백 명 가량이 ‘KB동산’(또는 KB한마음)을 통해 재취업할 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앞으로 이 숫자가 늘어난다 해도 이들 전원을 구제한다는 것이 은행측의 기본 방침이다.
시장 논리와 휴머니티의 접점 찾을까

국민은행이 선보인 ‘낙엽줄 구하기 프로젝트’는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다. 국민은행 이낙원 노조위원장은 명퇴를 받아들이기로 회사측과 합의한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이같은 방식이 ‘남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 모두 상생하는 방안’이 될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국민은행 노조는 이번 합의로 구성원 일부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 8년차인 한 대리는 “솔직히 노조를 못믿겠다. 노조쪽 사람 중에 명퇴 대상이 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느냐”라며 노조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그는 또 일자리 나누기에 대해서도 “말이 좋아 명퇴자 재고용이지, 결국 기존 정규직 자리를 값싼 비정규직 자리로 대체하는 데 노조가 들러리 선 것밖에 더 되느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비정규직은 불만을 넘어 아예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명퇴금이고 전직 지원 프로그램이고 모든 것이 정규직을 위한 ‘그들만의 잔치’일 뿐 비정규직에게는 그림의 떡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민은행의 이번 실험에 대해 명퇴 당사자들은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50대인 한 명퇴 신청자는 “비록 연봉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겠지만 당장 실직자 신세는 면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덜 비참하다”라고 말했다.

외부에서도 국민은행에 거는 기대가 크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 책임연구원은 “명퇴한 준고령층(중장년층)을 그대로 방치하면 신빈곤층으로 추락하기 쉽다. 중층적인 노후 생활 보장 제도가 부족한 한국적 현실에서는 명퇴자들에게 새 일자리를 찾아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은행의 실험은 새로운 일자리 나누기 모델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낙엽줄 구하기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 떨어진 절체절명의 과제라 할 수 있다. 그간 청년 실업 문제에 가려 크게 공론화하지 못했지만, 조기 퇴직·명예 퇴직 등으로 인한 중장년 실업은 이미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협하는 시한폭탄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국민은행의 이번 실험이 무자비한 자본의 욕망을 포장해 가리는 당의정이 될지, 아니면 ‘시장 논리와 휴머니티 사이, 곧 기업의 수익성과 사회 공익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접점을 찾는 몸부림’(강진섭 직원만족팀장)이 될지 사회적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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