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고’ 또 맞은 물류대란
  • 고제규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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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연대 1차 파업 후 노·사·정 협상 ‘고장’…정부는 뒷북치기 강경 대응
포항에 사는 고성학씨(41)는 25t 화물차 운전사였다. 그에게 운전대는 노모와 부인, 아들 2명 등 다섯 식구의 생계가 달린 밥줄이었다. 다른 화물차 운전사들처럼 그도 지입차주였다. 자기 차를 가지고 있으면서 운송업체 ㅇ사에 속해 화물 수주를 받았다. 그가 속한 ㅇ사는 다시 ㄹ사에서 하청을 받았다. 고성학씨가 운전대를 잡으려면 원청에 3%, 하청에 10% 해서 총 13%의 수수료를 물어야 했다.

누구보다 다단계 알선 피해를 겪어본 그는, 지난 2월 ‘늙다리 투사’가 되었다. 화물연대에 가입해 앞장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5월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화물연대 투쟁 때 그는 포항지부 교섭위원을 맡아, 알선 수수료 13%를 7%로 낮추었다. 언론에서는 정부나 운송업체가 화물연대에 ‘백기 투항’했다고 비난했지만, 고씨로서는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러나 수수료가 깎인 운송업주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반격은 다양했다. 고씨에게는 지입 차를 바꾸며 회사에서 빌린 3천만원을 일시불로 갚으라고 요구했다.

지난 7월27일 견디다 못한 고씨는 결국 목을 맸다. 고씨의 죽음은 화물연대 소속 차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화물연대는 악덕 회사가 고씨를 ‘타살’했다고 주장했다. 정부도 공범으로 지목되었다. 지난 5월15일 노·사·정 대타협 때 다단계 알선을 뿌리 뽑겠다던 정부가 두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8월21일 오전 9시, 화물연대는 다시 세상을 멈추게 했다. 2차 물류대란이 시작되었다. 화물연대의 요구 사항은 지난 5월 투쟁 때와 똑같다. 운임을 인상하고, 다단계 알선을 없애 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1차 물류대란 이후 이 지경이 되기까지 노·사·정은 무엇을 했는가?
5·15 대타협에 따라 협상은 운송업주의 특성 별로 세 종류로 나누어 진행했다. 시멘트 운송업체, 컨테이너 운송업체, 화물차 운송업체의 각 대표들이 화물연대 협상 상대로 나섰다. 화물연대는 협상을 따로 진행하면서도 일괄 타결을 시도했다. 문제는 시멘트 운송업체였다. 시멘트 운송업체는 사업장별 협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며 인상안조차 내놓지 않았다.

화물연대 지도부는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산별 형태의 일괄 타결을 고집했다. 컨테이너나 화물차 운송 사업자와의 협상에는 진전이 있었지만, 시멘트 운송업체와 삐걱거리면서 모든 협상이 중단되었다. 파국의 도미노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2차 물류대란이 터지자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았다. 지난 1차 대란 때와 달라진 점도 있다. 당시 화물연대에 끌려다닌다며 언론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맞았던 정부가 화물연대에 강경 일변도로 돌아섰다. 첫 번째 엄포는 사법 처리 방침이었다. 정부는 화물연대가 불법 파업을 벌였다며 업무방해죄로 사법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화물연대 투쟁은 노동자들의 ‘파업’이 아니다. 법적으로도 개별 사업주들이 집에서 쉬는 것은 업무방해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물류대란으로 국가 경제에 미치는 피해가 확산되면서 정부는 ‘업무복귀 명령제’나 ‘화물자동차 운전자 자격제도’ 등을 도입해 단체 행동을 막겠다는 초강경 대응도 구상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화물연대는 참여정부가 막가파 정부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이번 파업으로 인한 경제 손실은 막대하다. 하지만 1차 대란 이후 노·사·정이 지혜만 모았다면 막을 수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한국은 ‘물류대란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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