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황장엽 망명’ 개입으로 안기부만 골탕
  • 김 당 기자 ()
  • 승인 1997.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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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거부한 안기부 제치고 ‘OK’ 사인…일부 측근 재벌 2세들이 대북사업 막후 지원
지난호 <시사저널> 커버 스토리 기사가 ‘한보-김현철 커넥션’의 뇌관을 터뜨렸다. ‘남북관계 좌우한 김현철, 대북 4대 프로젝트 추진’이라는 커버 스토리 기사가 실린 <시사저널>(제388호)이 발매된 3월26일 일본 <아사히 신문>(석간) 등 외신과 연합통신, 서울방송(SBS) 등이 이 기사를 인용 보도한 것을 계기로 ‘김현철-한보 커넥션’ 및 김씨의 대북 관계 개입 의혹을 폭로하는 기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국회 국정조사 특위가 규명하려는 ‘한보-김현철 게이트’의 핵심은 한보-김현철 커넥션을 밝혀내는 데 있다. 이른바 ‘몸체 의혹’의 실마리는 한보그룹과 김현철씨(38)가 도대체 어떤 관계였는지가 먼저 밝혀져야 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보 사건 재수사에 착수한 검찰의 수사 초점은 한보가 비자금을 조성한 경위와 사용처를 규명하고, 궁극적으로 자금 대출 압력을 행사하는 데 현철씨가 개입했는지를 밝히는 데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김씨 개입 여부에 관한 수사는 현재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으로 알져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사저널>이 지난호에서 제기한 김씨의 ‘4대 대북 프로젝트’ 중의 하나인 한보에 대한 대북 투자 권유 건은 한보-김현철 게이트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 단서는 △김씨가 95년 당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에게 한보의 비자금으로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에 투자할 것을 권유했고 △한보가 대북 투자 합작 파트너인 중국 연변 용흥집단공사(최원철 회장)와 시범사업으로 삼은 운수업 투자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김씨가 서울에 온 최회장을 수 차례 만나 한보의 대북 진출을 적극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는 최회장의 증언이다.

한보 대북투자 개입이 의혹 ‘몸체’

더구나 정태수 회장과 함께 김현철씨를 수 차례 만났다는 최회장의 주장은, 정회장을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해온 김현철씨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의 진술이 맞는지 규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또 최회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위장 기업(한보의 위장 계열사인 세양선박일 가능성이 큼)을 계약 당사자로 내세우고 한보가 계약 이행을 보장한 이면 계약서가 검찰이 압수한 한보그룹 서류 중에 끼어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한보가 일단 5억원을 투자하기로 계약한 이 시범사업은 이행되지 않았다. 95년 10월에 계약(이면 계약)을 맺었으나 정태수 회장이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회장은 당시 북한 당국으로부터 운수업 허가를 받아 사업을 약속한 상황이어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아자동차로부터 자동차(스포티지·포텐샤·버스 등) 2억3천만원어치를 수입해 현재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용흥집단공사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자동차 운수업·식당업·오피스텔업·건설업 사업 허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최회장이 한 말은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진술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므로 최회장의 진술에서 드러난 대로 △현철씨가 어떻게 한보에 거액 비자금이 조성되어 있는지를 알았으며 △왜 현철씨가 하필이면 북한에 그 비자금을 ‘대규모로 투자하라’고 한보측에 권유했으며 △현철씨는 왜 최회장에게 굳이 한보의 대북 진출을 적극 도와 달라고 요청했는지 △한보측은 왜 이면 계약을 맺어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을 위반하면서까지 자금 출처를 숨기려 했는지에 대한 해답, 즉 김현철씨가 추진한 여러 대북 프로젝트 중의 하나인 한보 대북 투자 개입 건이 한보-김현철 게이트의 열쇠인 것이다.

또 이 열쇠는 한보의 대규모 비자금이 △세간의 의혹대로 92년 대선에서 선거 자금을 관리한 김현철 캠프가 쓰고 남은 대선 자금을 한보에 관리해 달라고 위탁한 것인지 △김씨의 자금 관리인으로 알려진 (주)심우 박태중 대표가 외국 기업으로부터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리베이트 자금의 일부인지 △한보철강이 대출받은 설비 자금에서 빼돌린 순수한 비자금인지를 규명할 수 있는 핵심 단서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것은 최근 <한국일보>(3월30일자 1면 머리 기사)가 한보그룹이 정부 허가를 받지 않고 북한 황해제철소의 경영권을 인수하기 위해 3백30만달러(29억7천여 만원)를 불법 투자했다고 보도한 대목이다. 이 신문은 또 한보가 공식 경로를 무시하고 북한에 투자할 수 있었던 배경과 관련해, 현철씨가 96년 북한 마그네사이트를 한보가 수입해 그 대금을 북한에 쌀을 제공할 미국 카길사에 주는 방안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져 관련 여부가 주목된다고 보도했다. 한보-김현철-카길사로 이어지는 김씨의 대북 쌀 판매 협상 개입 사실은 <시사저널>이 지난호에서 제기한 내용이다.

95년부터 추진된 이른바 ‘NK 프로젝트’라고 부른 한보의 황해제철소 불법 투자(선철 수입 및 경영권 참여) 의혹은 지난 임시국회에서 제정구 의원(민주당)이 이미 제기했다. 그러나 이 신문 보도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검찰이 이같은 사실을 확보해 대북 투자 사업을 주도한 정태수 총회장의 4남 정한근 부회장 등 한보 관계자들을 소환해 사법처리하는 방안과 함께 비밀 투자가 가능하도록 도와준 정부 고위 인사가 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고 밝힌 부분이다. 이 사업 자체가 95년부터 정태수 회장이 정부 고위 관계자의 요청을 받은 뒤에 추진되어 온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정부 고위 관계자는 누구일까. 이는 김현철씨를 직접 지칭하거나, 아니면 <시사저널>이 지난호에서 김씨의 정권 재창출 및 대북 프로젝트를 추진한 이른바 ‘K 2’(경복고) 인맥의 핵심 인사라고 지목한 이원종 전 정무수석 및 오정소 전 안기부 1차장일 가능성이 크다. 이 단서에 접근할 수 있는 한 통로는 임채정 의원(국민회의)이 제공했다. 임채정 의원이 제기한, 현철씨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재벌 2세들의 모임인 경영연구회의 이른바 ‘황태자 그룹’이 그것이다. 임의원은 현철씨와 긴밀히 연결된 이 그룹을 오정소씨가 관리해 왔다고 주장했다. 안기부, 공작 목표 할 수 없이 수정

이른바 김현철씨의 중고등학교 동창들만의 사적 모임인 ‘이너 서클’의 일원으로서 지난 수년간 황태자 그룹을 옆에서 지켜본 이의 증언에 따르면, 황태자 그룹의 멤버 중에서도 김씨와 주로 술자리를 함께한 핵심 4인은 대호건설 이성호 사장, 코오롱그룹 이웅렬 회장,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 한보그룹 정보근 회장이다. 공교롭게도 이 30대 4인이 소유한 기업 그룹은 모두 대북 투자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해 왔다.

이 중 가장 주목되는 이는 현철씨와 재계 2세 그룹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대호건설 이성호 사장(35)이다. 일부 언론과 G남성클리닉 박경식 원장은 대호건설이 서초종합유선방송 사업권을 따내고, 자회사인 세미냉장이 영동고속도로 소사휴게소 운영권을 확보하는 데 현철씨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또 대호건설은 국내 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연변 선호기업집단(리철호 총경리)을 통해 나진·선봉 지대의 공단 개발·이용·임대권을 확보해 관심을 끌었다.

김현철씨와 같은 고려대 출신으로 비슷한 시기에 함께 미국에서 유학해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진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37)도 △코오롱그룹이 제2이동통신 지배 주주로 선정된 것 △박태중씨(심우 대표)가 출자한 의류업체 파라오를 거액을 주고 인수한 것 △심우와 함께 원목 수입 사업을 추진한 것 등과 관련해 김씨와 유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코오롱그룹 또한 김양일 전 미주한인식품상총연합회 회장의 중개로 대북 투자사업 벌이고 있다.

금강산국제그룹(박경윤 회장) 고문 직함을 가지고 대북 사업을 진행해온 김양일 전 회장은 <시사저널>이 보도한 ‘청와대 밀가루 북송사업’을 중개한 인물이다. <한겨레>는 최근 김양일씨가 코오롱상사의 미국 로스앤젤레스 현지법인인 코오롱캘리포니아와 합작해 한미식품상구매회사를 만들어 95년 5월 평양과 원산 근처에 5천6백여 평 규모의 과일 가공 공장을 설립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김양일씨는 김현철씨의 대북 비선이자, 밀가루 북송 사업의 중개인이었다.

<시사저널> ‘밀가루 북송’ 취재팀은 처음부터 이 사건에 김현철씨가 깊숙이 개입해 있다는 의혹을 갖고 있었다. 우선 지난해 11월 당시 <시사저널> 보도가 문제되자 김광일 비서실장이 국회에서 극구 부인하면서 <시사저널> 편집 책임자와 기자를 즉각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고발한 것부터가 수상쩍었다. 즉 누군가를 보호하거나 불똥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한 초강경수가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현철씨보다는 김대통령을 보호하려는 제스처로 해석되었다.

나중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진로그룹 또한 현대그룹 등 다른 대기업들과 함께 청와대 또는 김현철씨측이 요청한 대북 식량 및 물자 지원에 가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후 진로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가 청와대 및 안기부 관계자들을 만나 <시사저널> 기사를 문제 삼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시사저널> 취재진에게 포착되었다. 또 대북 지원 사업을 벌인 일부 대그룹 임원들도 청와대 및 안기부 고위 관계자들한테 <시사저널> 기사를 문제 삼지 말자는 견해를 밝힌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같은 건의는 청와대측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해당 기자에 대한 검찰의 무리한 긴급 구속과 기소로 이어졌다.

그러나 청와대 밀가루 북송 건은 현철씨 캠프가 추진했던 여러 대북 사업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 1차적 목표는 2002년 월드컵 남북 공동 유치에 있었지만 최종 목표는 다른 여러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정상회담 추진을 위한 고위급 회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북 정보기관 소식통들에 따르면, 황태자 그룹과 그 대북 비선들이 가동된 현철씨의 대북 프로젝트는 잠수함 사건 같은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와 전문성 부족으로 상당 부분 실패했다.

남북 관계나 대북 프로젝트는 김씨의 천거로 청와대 민정비서실에 근무한 최동렬 행정관(36) 등 사조직의 아마추어들이 다루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전문적인 영역이었기 때문이다(그는 민원 업무를 담당하면서도 수 차례 중국을 방문했고, 지난해 9월에도 현철씨의중국 방문을 수행했다). 대북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현철씨 팀은 혈기방장하고 의욕만 넘쳤지 전문성과 보안 의식이 부족했다. 그 대표적인 실패 사례가 황장엽 비서 망명 개입 건이다”라고 지적했다. 황비서가 망명에 성공해 현철씨 캠프는 ‘한건’ 했을지 모르지만 대북 공조직은 현철씨가 개입함으로써 공작에 실패했다는 말이다. 왜 그랬을까.어느 나라 정보기관이든 공작의 기초는 먼저 대상을 선정한 뒤에 기본 목표와 임무를 선정한다. 황장엽 비서는 오래 전부터 대북 정보기관에서 공을 들여온 ‘포섭 대상’이었다. 이는 흔히 단기 작전에서 부여되는 ‘유인(납치) 대상’과는 중요한 차별성을 지닌다. 즉 포섭할 목표는 신변에 위협이 올 때까지 최대한 박아두고 상대국의 정보를 활용하는 데 있지만, 유인할 목표는 주로 중요 군사 정보를 가진 인물을 빼돌려 적에게 타격을 주는 데 있다. 그러나 황비서는 학자 출신 이론가이지 군 및 정보기관과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유인 대상이 아니었고, 실제로 대북 정보기관은 황비서가 측근인 김덕홍 여광무역사장을 통해 여러 번 사인(망명 의사)을 보내왔지만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황비서의 망명이 남북 관계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오히려 정보기관은 황비서가 한국보다는 북한에 남아서 통일사업을 수행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한건주의에 사로잡힌 김현철 캠프가 정보기관의 특급 정보(망명 의사)를 가로채 일부 조직을 동원해 개입(접촉 및 망명 OK 사인)함으로써 황비서는 망명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빠졌고, 오랫동안 공을 들여온 대북 정보기관은 공작 목표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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