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상 제정 논란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8.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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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론자,철회론자 평가 엇갈려 논쟁 게속될 듯
김활란상 제정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이화여대가 내년 5월 고(故) 김활란 박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우월(又月) 김활란상’을 제정하겠다고 밝힌 10월 중순부터 시작된 논란이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김봉우)를 중심으로 한 몇몇 민간 단체와 네티즌은 대표적인 친일파 인사를 추모하는 상을 제정하겠다는 것은 시대 착오적 발상이라며, 지난 10월25일 이화여대 앞에서 김활란상 제정 철회를 촉구하는 연대 시위까지 벌였다.

동일 인물에 대한 평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김활란 박사에 대한 평가는 양 극단을 달리고 있다. 먼저 김활란상 제정론자들은 ‘한국 여성 가운데 김박사에게 간접으로나마 빚을 지지 않은 이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한국 최초의 여자 박사, 트레머리를 잘라버린 최초의 단발 여성, 결혼 대신 일을 선택한 당당한 독신 여성’으로 상징되는 그는 신문화·신교육·신여성을 대표하는 한국 근대사의 독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상징적인 위치뿐만이 아니다. 김박사는 여성 고등 교육의 기틀을 닦는 데도 실질적인 공헌을 했다. 광복 직후 연희대·세브란스 의대·이화여대를 통합하려는 계획이 진행되었을 때 ‘국회 의석의 절반을 여성이 차지하는 날이 올 때까지 남녀 공학은 안된다’며 이화여대를 지킨 것도 그였고, 여자 대학에 의학과나 법학과가 아직 필요하지 않다는 시기상조론이 고개를 들 때마다 이를 앞장서 분쇄한 것도 그였다.

이에 반해 김활란상 제정 철회론자들이 바라보는 김박사는, 이화여대가 낸 광고를 패러디해 만든 구호대로 ‘한국의 여성으로 태어나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던 사람’일 뿐이다. 곧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 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신시대> 42년 12월)’며 젊은이들을 징용으로 내몰고, ‘중대한 결전의 시기에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 있겠느냐(<매일신보> 43년 12월25일)’며 여성들을 선동했던 민족 반역자가 ‘야마기 가쓰란’(天城活蘭·김활란씨가 창씨 개명했던 이름)인 것이다.

이화여대도 김박사의 이같은 친일 행적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화여대는 한 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한국 여성사에 끼친 그의 공헌을 어떤 형태로든 재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어 김활란상을 제정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 학교측은 내년 5월에 있을 학술 세미나에서 김활란 박사의 업적을 둘러싼 시시 비비를 가리겠다며, 그때까지 반대론자들의 주장에 공식 대응은 일절 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상 제정 앞서 시시비비 가렸어야

이같은 입장을 천명했지만 이화여대는 앞뒤가 바뀌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김활란상을 제정하기에 앞서 역사적 평가와 관련된 시시 비비를 가렸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그것이다. 친일 행적과 관련된 시비를 예견하면서도 이화여대가 김활란상 제정을 밀어붙인 데는 역사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김활란상 제정에 관여한 이화여대의 한 관계자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친일 △소신에 따른 친일 △정황상 불가피했던 친일 세 가지로 친일 행위를 구분하면서, 김박사의 경우 학교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친일 행위를 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박사의 친일 행각은 교장 직을 맡은 39년부터가 아니라 ‘교장 직을 머지 않아 맡을 가능성이 엿보인’ 36년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이 강정숙씨(영남대 강사·여성학)의 지적이다. 조선부인문제연구회 결성(36년), ‘총후 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 조직(38년) 등이 강씨가 제시한 증거이다. 즉 학교측은 이미 역사적 검토를 끝냈다지만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었던 셈이다.

일부 이화여대 교수들은 김활란상 제정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이 한국 사회의 편협성과 반여성적 태도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김성수·김동인 씨가 벌인 친일 행각에도 불구하고 ‘인촌상과 동인문학상이 이렇게까지 문제된 적은 없지 않았느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 잔재를 제때 청산하지 못해 이런 해괴한 일이 생겼다며 ‘김활란상 제정이 친일파 부활의 신호탄이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결국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 온 모순들을 상처투성이로 드러낸 채 김활란상 제정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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