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천억원의 '엑소더스', 여친 주민 이주
  • 광주·나권일 주재기자 ()
  • 승인 1996.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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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천공단 주변 주민들, 조속한 집단 이주·배상 촉구… ‘무대책 정부’ 강력 규탄
 
전남 여천시 여천국가공단 한복판 중흥동 입구 도로에는 대기오염도를 알려주는 전광판이 있다. ‘아황산가스 0.12ppm 1시간 기준치 0.250ppm, 오존 1시간 0.032ppm. 환경 기준 0.100ppm.’ 전광판 수치는 기준치 이하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최근 이 곳 주민 가운데 이 전광판의 수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환경 영향 평가를 한 결과 삼일동·상암동·묘도동 등 여천국가공단 주변 10개 마을은 심각한 대기·수질·토양 오염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임이 밝혀졌다. 특히 이 지역 환경 오염 상태는 84년 주민을 집단 이주케 한 울산·온산 공단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밝혀져, 1만5천명에 이르는 주민 이주 문제가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여천시(시장 정채호)가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용역을 주어 93년 10월부터 95년까지 이 공단 일대의 환경 오염 실태를 정밀 조사한 ‘여천공단 주변 마을 환경영향 및 대책에 관한 연구’(연구책임 만규홍 KIST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공단 주변 대기 중에서는 인체에 치명적인 마취성 유기 오염 물질인 클로로포름이 기준치(미국 허용 기준치로 0.072 ppb)의 8배를 초과하는 0.58 PPb(1ppb는 1천분의 1ppm)나 검출되었다.

또 공단과 광양제철 부근에 자리잡은 묘도동 인근 바다에서는 언어 장애와 눈·귀 기능 상실을 일으킬 수 있는 미나마타병의 원인 물질인 수은이 0.286ppb나 검출되었다. 공단 주변 하천과 지표수의 화학적 산소요구량(COD)은 허용 기준치의 1.7배인 3.4ppm, 생물화학적 산소요구량(BOD)은 기준치의 2.4배인 10ppm 으로 나왔다. 특히 여천공단을 끼고 있는 광양만 주변의 어패류와 농작물은 식용 제한 조처를 취해야 할 정도라는 결론이 나왔고, 주변 마을 농작물의 감수율(減收率)도 28~33%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수은 오염 조짐까지 나타나


주민들이 앓고 있는 각종 질환도 심각한 상황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환경부가 국립환경연구원을 통해 93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 지역 주민의 탈모증은 85년 최초 조사 때보다 3배나 증가했다. 혈중 납 농도(3.9 ㎍/㎗)와 카드뮴 혈중농도(0.6 ㎍/㎗)도 온산공단 지역(각각 3.7 ㎍/㎗ 와 0.4 ㎍/㎗)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천시보건소가 94~95년 2년간 공단 주변 주민 1만4천1백67명을 진료한 결과는 감기·폐렴 등 호흡기 질환이 21%, 고혈압 등 순환기 계통 질환이 9%, 피부염 등이 7% 이상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은 오염을 보여주는 초기 조짐이 나타난 것은 더 큰 충격이다. 여수·여천지역사회연구소 이영일 소장은 “일본에서 확인된 미나마타병의 초기 확산 조짐인 고양이들의 집단 폐사를 묘도동 주민들이 마을에서 수 차례 목격했다. 머지 않아 수은 중독 증상이 사람들에게까지 나타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여천국가공단은 LG석유화학을 비롯해 한화종합화학·제일모직·대림산업·금호석유화학 등 대기업체 공장을 중심으로 현재 모두 90개 업체가 5백83만평에 이르는 땅에 입주해 있다. 이 공단에서 벤젠과 페놀을 비롯해 유류·합성수지·합성고무·비료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연·카드뮴·납 같은 중금속과 황화수소 등이 여천을 최악의 오염 상태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여천공단의 정기 환경 검사를 담당하는 영산강 환경관리청 순천출장소의 직원은 고작 3명이다. 오염을 판명할 기술 여건도 부족할 뿐더러 오염 배출 업소조차 찾기 힘들다. 주민들의 주장대로 최악의 환경 오염이라는 결과는 나왔는데, 원인 제공자는 찾을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전라남도와 여천시는 조사 결과가 미칠 파장을 우려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보고서를 5개월 넘게 공개하지 않아 왔다. 환경 오염 조사 결과에 따른 집단 이주 대책 등을 전남도와 정부에 촉구하고 협의하느라 불가피하게 공개가 늦어졌다는 것이 여천시의 해명이다.

전남도와 여천시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조사 결과가 나오자 4천여 가구 1만5천명에 이르는 주민을 내년부터 3년에 걸쳐 집단 이주시키기로 결정하고, 비용 부담을 정부에 요구했다. 여기에는 토지·건물 보상비와 이주 대책비를 비롯해 무려 6천8백여억원에 이르는 재원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환경부는 현재 주민 이주와 관련해 확실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은 여천공단이 국가 공단인 만큼 토지 및 건물 부분 보상은 국가가 부담하고(6천1백87억원) , 생활 기반 상실에 따른 간접 보상비(5백97억원)는 원인자 부담 원칙에 따라 입주 업체들이, 주민 정착과 복지 향상 등 이주대책비(81억원)는 여천시가 부담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도표 참조).
 

삼일동·상암동·묘도동 등 여천공단 주변 세 마을 주민들은 지난 13일 대책회의를 열고 조속한 집단 이주와 30년 동안 누적된 피해에 대한 국가 차원의 배상을 촉구했다. 주민들은 이 날 ‘여천공단 주민 생존권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17일 정부 규탄 대회를 열었다.

생존권대책위원장 조봉옥씨(36·여천시 중흥동)는 “여천공단 주변 마을 거주자 이주는 92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당시 공약 사항이었다. 주민 이주와 관련해 국회 차원의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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