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회피 일색 '전씨 답변서'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5.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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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 답변서/“적법 절차 밟았다” “불가피했다” 책임 회피 일색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전격 구속함으로써 전씨가 ‘골목 성명’에서 예고한 반격은 다소 싱겁게 끝나버렸다. 그러나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전씨는 검찰 조사에서 핵심 쟁점에 대해 답변의 초점을 흐림으로써 앞으로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일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측이 바라보는 12·12와 5·18은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정동년 광주민중항쟁연합 의장 등이 체험한 두 사건과는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룬다. 15년 전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정승화 전 계엄사령관에게 ‘내란 방조죄’를 걸었으나, 지금은 정승화씨가 전두환씨 등에게 ‘내란죄’를 들이밀고 있다. 80년 당시 김대중 국민연합 의장과 함께 ‘내란죄’로 처벌되었던 정동년씨 역시 전두환씨를 ‘내란 및 반란의 수괴’로 지목하고 있다.

지난 12월2일 전두환씨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지난해와 올해 각각 제출한 12·12와 5·18 답변서 외엔 달리 할 말이 없다’며 검찰 소환을 거부하고 경남 합천으로 내려갔다. 그는 또 ‘김영삼 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역사관을 분명히 해주기 바란다’고 요구해, 앞으로의 검찰 수사와 재판을 좌우 이념 대립 구도로 끌고 갈 것임을 시사했다. 전씨의 5·18 답변서는 80년 당시 그가 김대중씨를 좌파 지도자로 보았으며, 좌파의 준동을 막는 과정에서 ‘성공한 쿠데타’로 가게 되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김대중씨 복권은 내 덕”

전씨는 답변서에서 80년 3월26일 김대중 국민연합 의장이 YWCA 강연에서 “민주주의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고, 4월17일 서울대 강연에서는 4·19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군과 75년 4월 박정희 군부 독재에 항거해 할복 자살한 서울 농대생 김상진군을 거론하며 “김상진과 김주열 못지 않게 김재규도 충신이다”라고 말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전씨는 2월29일 김대중씨가 복권된 것은 자신의 주장을 최규하 대통령이 수용해서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또 전씨는 ‘10·26 이틀 후 북한은 폭풍 5호라는 전투태세 강화 조처를 취했고 80년 3월부터는 시위 군중을 폭도로 변질시키라며 남한내 간첩들에게 점화기폭조로 잠입할 것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전씨는 또 ‘학생 시위가 격심해진 틈을 이용해 북한이 80년 5월 15∼20일에 남침을 감행할 것이라는 일본 내각 조사실의 첩보가 있어, 5월12일 전 공무원에게 비상근무령을 내리고 전군에 대북 경계 태세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5·17 비상계엄 확대 조처는 북한의 움직임에 대응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80년 4월의 사북사태에 이은 대학가의 시위도 전씨에게는 5·17 비상계엄 확대 조처를 취하게 한 명분이 되고 있다. 전씨는 5월16일 김대중씨가 제2차 민주화촉진선언을 발표하며 “19일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으면 22일 정오를 기해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촉진 국민대회를 갖겠다”고 선언한 것에 주목하였다. 전씨는 80년 5월16일 59개 대학 총학생회장이 이화여대에 모여 22일까지 비상계엄을 해제하라고 한 것 역시 김대중씨와 연결된 정·학(政·學) 연대의 반정부 봉기로 보고 있다.

“계엄 확대는 주영복 장관 독자 판단”

전씨는 답변서에서 ‘김종환 내무부장관은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5월14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계엄군 출동을 요청했다’며, 5월17일 오전 9시 자신이 최대통령에게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씨를 반공법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만 수사해 왔는데, 내란 음모 혐의가 추가로 드러나 수사 초점을 바꾸겠다고 보고했다’고 설명하였다.

검찰 수사 결과문과 겹치는 전씨측의 주장은 5·17과 관련된 극히 일부분이다. 전씨는 답변서에서 ‘주영복 장관의 독자 판단으로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내용이 결정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5월17일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을 주영복 국방부장관에게 보내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기구를 설치하는 등 시국 수습 방안을 최대통령에 보고할 것이라고 통보하면서, 대통령이 이같은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결의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혀 전씨측 주장을 배척했다.

전씨가 신현확 총리에게 시국 수습 방안을 보고한 바 없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검찰은, ‘80년 5월17일 오후 4시 전씨가 주영복·이희성 씨와 함께 신총리를 찾아가 시국 수습 방안을 보고했다’며 5·17 비상계엄 확대 조처 등은 전두환씨가 주도해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현확 총리가 국보위 설치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전씨측 주장에 대해서도 검찰은 ‘신총리는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고 결론짓고, 5월17일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국회 해산과 비상기구 설치 등을 최대통령에게 보고한 것도 ‘직무와 상관 없는 월권 행위’라고 밝혔다.

5·18과 관련해 검찰은, 보안사 최예섭 준장과 홍성률 대령이 광주에 내려가 상황을 보고했다며, 보안사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처하는 데 깊이 관여했다고 밝혔다. 전씨가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해 설명한 ‘김대중 내란 음모 혐의’에 대해서도 검찰은 ‘합수부가 주도한 당시 수사는 김대중씨가 광주 시위를 배후 조종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을 썼다’며, ‘5·17 이전의 김대중씨 움직임이 5·18과 직접 연결된다’는 전씨측 논리를 전혀 수용하지 않았다.

“병력 동원도 방어적 대응이었다”

12·12 사건은 전씨측 주장과 검찰 수사 결과가 같은 부분을 다루고 있어 비교하기 쉬운 편이다.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러 간 우경윤 육본 범죄수사단장을 쏜 사람이 누구였는가는 12·12사건의 원인 제공자를 밝힌다는 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이에 대해 전씨측은 ‘2층 계단에 있던 청년이 쏜 총에 우단장이 맞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사격한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정총장 아들이 (2층에서) 들고 내려온 권총에는 실탄이 없었고 공관 경비병들은 이미 제압된 상태였다’고 밝혀, 결과적으로 우단장이 합수부측 총격에 피격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12일 밤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들고온 정승화 총장 연행 서류에 재가하기를 거부한 직후, 대통령 경호실장대리 정동호 준장은 병력을 이끌고 최대통령이 머무르던 총리 공관을 포위했다. 이에 대해 전씨측은 ‘총리 공관을 포위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었기 때문에 경호실 병력이 총리 공관으로 출동한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정동호 준장은 경찰과 육본 헌병대가 합동 경호하던 총리실 경호 병력을 제압한 후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총리 공관에 올 때마다 그를 안내했다’며 두 사람 사이에 교감이 있었음을 암시했다.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정총장 연행을 재가한 데 대해 전씨측은 ‘강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검찰은 ‘노장관이 보안사령관 방에 들어가 강제로 문서에 서명한 다음 최대통령을 찾아갔다’고 밝힘으로써 강압에 의한 재가임을 명백히 했다. 병력 동원에 대해서도 전씨측은 ‘극도로 흥분한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이건영 3군 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수도기계화사단·26사단·9공수여단을 동원하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대응 병력을 동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전씨측은 이미 병력을 동원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며, ‘전씨측이 1공수여단을 동원하자 이에 대응해 육본측이 9공수여단에 출동을 지시했다’고 전씨측 주장을 일축했다.

전씨측은 15년 전 법원이 정승화씨의 내란 방조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으므로 검찰이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는 것은 일사부재리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번 조사가 정승화 내란 방조 혐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총장 연행 과정이 형사소송법상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는 것이라며 전씨측 주장을 일축했다.

검찰은 김영삼 대통령의 5·18 특별법 제정 결정이 있은 후 소환에 불응한 전씨를 하루 만에 구속하는 초강수를 휘둘렀다. 15년 전 전씨의 편에 서서 ‘칼’을 휘둘렀던 검찰이 이번에 김대통령의 편에 선 것은 스스로 ‘권력의 시녀’임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5·18과 12·12의 실체는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이러한 ‘검찰의 치부’가 더더욱 커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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