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관제 시스템, 설치업체 선정 ‘잡음’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8.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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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미국에서 ‘결점’ 드러나…현대정보기술 “불공정한 선정” 의혹 제기
새로운 항공교통관제시스템 설치 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고 있다. 사업자 선정 과정을 주관하는 건설교통부 산하 대구항공교통관제소는 지난 4월1일 최우선 협상 대상자로 삼성SDS와 미국 록히드마틴이 주도하는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그러자 탈락한 현대정보기술과 미국 레이디온이 즉각 선정 과정이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현대정보기술은 4월3일 감사원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재입찰을 요구했다. 새로운 항공교통관제시스템은 국내 비행정보 구역에서 이착륙하는 항공기들이 충돌하는 것을 방지하고, 이착륙 시간을 정시에 맞추는 일을 한다. 이 시스템은 일단 대구공항에 설치되었다가 인천국제공항이 완공되면 그곳으로 이관된다.

입찰에 참여한 컨소시엄은 삼성SDS와 록히드마틴, 현대정보기술과 레이디온, 금호텔레콤과 휴즈 세 곳이다. 현대정보기술과 금호텔레콤이 주도하는 컨소시엄은 각각 2, 3위 협상자로 뽑혔다. 그러나 대구항공교통관제소와 삼성SDS가 벌이는 가격 협상이 원만하게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이들이 사업자로 선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국 관제사들, 록히드마틴에 항의

논란의 초점은 록히드마틴의 기술이 과연 믿을 만한가 하는 점이다. 삼성SDS의 제휴선으로 주요 기술을 제공하는 록히드마틴이 영국과 미국에 설치한 항공관제시스템 관련 시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록히드마틴이 영국 햄프셔 지방의 스완위크 관제센터에 설치한 관제 시스템은 현재 기능에 이상이 생겨 개통하지 못하고 있다. 원래 96년에 완료되었어야 할 사업이 2002년에야 개통될 전망이다.

새 시스템을 가동할 수 없게 되자 영국 히드로 공항은 30년 전에 설치한 관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그 때문에 히드로 공항에서는 이착륙하는 항공기들이 충돌할 뻔한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났다. 지난해 8월 히드로 공항에서 이륙하는 영국항공(BA) 소속 항공기와 착륙하기 위해 진입하는 버진 항공기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일도 있었다.

이처럼 대형 사고 위험이 늘어나자 영국 의회는 4월7일 새 관제 시스템의 취소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조사를 벌일 것을 요구했다. 새 관제 시스템이 지닌 소프트웨어의 문제를 정밀하게 검사해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나면 이 시스템 설치 자체를 취소할 수 있다. 하지만 새 시스템을 도입하려면 10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사업 취소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항공 교통량이 늘어나는 추세를 감안하면 새 시스템을 가동하기 전에 대형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이 관제 시스템을 처음 수주한 곳은 록히드마틴이 아니라 IBM이었다. IBM 계열사인 페더럴시스템스가 92년 10월 9천만달러에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93년 10월 IBM은 큰 손실을 입고 페더럴시스템스를 팔았다. 그 회사를 95년 1월 록히드마틴이 인수한 것이다.

항공관제 시스템과 관련해 또 다른 말썽이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4월17일자에서 ‘연방항공국은 30년 된 장비보다도 용량이 떨어지는 새 장비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관제사들과 타협점을 찾을 때까지 10억달러 규모의 항공교통 현대화사업을 연기하는 데 동의했다’고 보도했다.

이 사업은 미국 상공을 비행하는 항공기를 관제하는 항공교통관제소 스무 곳에 새 레이저 스크린 관련 장비를 설치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디스플레이 시스템 교체(DSR). 미국관제사협회는 새 레이더 스크린이 소프트웨어와 그 작업 환경을 비롯해 많은 부문에 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난 1년 동안 항의해 왔다. 이 프로젝트는 록히드마틴이 미국 전체 항공관제 시스템에 적용하기 위해 수주한 것이다.

국내에서 새 항공교통관제시스템 설치 업체 선정이 시작된 때는 지난해 7월. 사업설명회를 가진 뒤 11월에는 현장을 실사했다. 배점은 기술 부문 90점, 가격 부문 10점이었다. 평가위원회는 항공대 김종선 교수를 위원장으로 해 항공관제 시스템 전문가 7명으로 구성했다. 기술 제안과 현장 실사 부문에서 삼성SDS와 록히드마틴이 최고점을 받아 지난해 11월 우선 협상 대상 업체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사업자 선정 자체를 취소할 돌발 변수가 생겼다. 지난해 10월 외환 위기로 환율이 두 배 이상 급등하자 기존 공사 설계 예산인 3백35억원으로는 채산을 맞출 수 없게 되어 삼성SDS­록히드마틴 컨소시엄이 협상을 포기하고 손을 들었다. 현대와 금호도 잇달아 협상을 포기했다. 결국 건설교통부가 환율 급등 부문을 보상하겠다고 약속한 뒤 다시 협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건설교통부는 재입찰을 하지 않고 1차 평가 결과를 인정한 상태에서 가격 협상에 들어갔다.

그러자 현대정보기술은 건설교통부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사정 당국에 조사를 요구했다. 현대정보기술은 1차 평가 과정 자체가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가격 부문을 가장 크게 문제 삼고 있다. 건설교통부가 제시한 입찰 상한액은 3백35억원인데 삼성SDS는 3백96억6천만원을 제시했다.‘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시행령’(국가계약법) 42∼44조에 따르면, 국고에 부담이 되는 경쟁 입찰에서는 예정 가격 이하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현대정보기술은 이 조항에 의거해 입찰자 세 곳 가운데 한 곳보다 20% 이상 높은 가격을 제안한 업체는 당연히 우선 협상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삼성SDS는 법적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삼성SDS는 그 근거로 국가계약법 시행령 제43조‘협상에 의한 계약 체결’ 조문을 제시한다. 즉 ‘계약의 특수성, 긴급성, 기타 국가 안보 목적 등의 이유로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국가에 가장 유리하다고 인정되는 자와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SDS는 또 평가 항목 배점에서 가격은 10%밖에 되지 않고 기술력이 90%나 되기 때문에 기술력이 우수한 삼성SDS가 선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삼성 SDS의 로비 입증할 증거 없어

현대정보기술은 또 배점이 높은 기술 평가와 현장 실사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기술 평가 부문에 참여한 평가위원들이 잘못된 자료를 가지고 평가해 부당한 점수를 받았다는 것이다. 현대정보기술은 현장 실사 부문에서도 삼성SDS보다 크게 뒤떨어진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현대정보기술은 기술 제휴선인 레이디온이 전세계 항공관제 시스템 사업을 록히드마틴보다 훨씬 많이 수주했는데도 기술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현대정보기술 김종환 차장은 “로비나 편파 판정이 있지 않고서는 이렇게 큰 편차가 나는 평가 결과가 나올 수 없다”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현대정보기술은 삼성SDS 컨소시엄 참여 업체인 글로벌테크가 로비를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건설교통부 관리 출신인 글로벌테크 이승기 부사장이 사업자 선정을 주관하는 건설교통부에 로비를 벌여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부사장은 “평생 항공관제 기술에만 몰두한 사람이 대기업 영업 사원보다 더 뛰어난 로비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현대정보기술은 로비설을 입증할 만한 물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부사장은 현대정보기술을 상대로 소송을 벌일 것을 검토하고 있다.

현대정보기술은 지난해 12월4일 이의 제기서를 감사원에 처음 제출했다. 감사원은 직접 조사하지 않고 이를 건설교통부에 넘겼다. 건설교통부는 12월22일에 보낸 답변서에서, 현대정보기술이 제기한 이의를 모두 부인하고 선정 과정에 문제가 없다는 유권 해석을 내렸다. 현대정보기술은 현재 감사원의 직접 조사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4월3일 다시 제출했다. 사업자 선정 주체인 건설교통부의 해명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경부고속철도 사업이 예산 배정과 기술 부문에 하자가 생겨 막대한 국가 예산을 낭비한 채 지지부진한 상태다.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새 항공교통관제시스템 사업 역시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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