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맹공'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1998.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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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금융 · 자본시장 '무조건 자유화' 추진도 잘못"
지난 12월3일 저녁 워싱턴에 있는 존스 홉킨스 국제대학원 강당은 학생들과 일반 청중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국제 자본가 조지 소로스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소로스는 92년 유럽 통화 체제의 취약점을 파고들어 무려 20억 달러를 벌어들였지만, 얼마 전에는 아시아 금융 위기 여파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러시아에서 엄청난 손해를 보기도 했다.

“국제 금융 질서는 붕괴했다. 새로운 손질이 필요하다. 경제학자들은 수요와 공급 법칙에 따라 시장의 균형이 유지된다고 주장하지만, 오늘날 금융 시장은 찢긴 풍선처럼 어디로 튈지 모른다. 문제의 핵심은 국제 자본의 흐름이다.”

소로스는 특히 ‘국제 신용 보험(international credit insurance)’을 새로 만들어 아시아 등 경제난을 겪는 나라에 제공할 것을 국제통화기금(IMF)에 제안했다. 물론 그가 기본적으로 국제 투기 자본가임에 비추어 볼 때 발언 의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세계 금융 자본의 흐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의 위치를 감안할 때, “기존 국제 금융 시장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라는 발언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IMF 내에서도 고금리 정책 비판

그의 강연이 있던 날 아침, <뉴욕 타임스> 1면에는 국제통화기금이 행한 고금리 처방을 비난한 세계은행의 <98/99 세계 경제 전망 보고서> 내용이 크게 실렸다. 이 기사를 쓴 데이비드 생거 기자는 세계은행이 마침내 오랜 침묵을 깨고 아시아 금융 위기와 관련해 국제통화기금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고 지적했다. 즉 국제통화기금이 단골 처방으로 내놓는 ‘고금리 정책’을 해당국의 경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강요하는 바람에 오히려 기업과 은행 들이 도산하고, 실업자만 잔뜩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비난에 대해 국제통화기금과 미국 재무부는 논란이 확산할 것을 우려해 공식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시아 금융 위기에 따른 국제통화기금의 일 처리 방식과 관련해, 가뜩이나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로부터 심각한 비판을 받던 클린턴 행정부 처지에서는 매우 뼈 아픈 지적이었다.

한 나라의 통화 가치가 떨어지고, 외국 투자가들이 손실을 우려해 자본을 철수할 경우 고금리 정책을 펴서 이를 막는 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제학의 상식처럼 여겨져 왔다. 지난해 금융 위기를 겪은 태국이나 한국이 한동안 두 자릿수 고금리 정책을 유지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의 맹점은 아무리 고금리를 유지해도 투자가들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별 효과가 없다는 점이다. 그 경우 고금리 정책은 기업·금융기관을 도산으로 몰고갈 위험이 크다. 실제로 올 상반기까지 한국 중소기업이 고금리를 못 이겨 줄줄이 도산한 것이나, 인도네시아 기업의 75%가 고금리 탓에 쓰러진 것이 이를 증명한다. 세계은행은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물론 국제통화기금으로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당시로서는 고금리 정책이 한국·태국·인도네시아 등 금융 위기를 겪는 나라들로부터 외국 투자 자본이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다는 것이다. 또 위기가 심해진 것은 고금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들 나라의 취약한 금융 시스템과 잘못된 정책 탓이었다는 것이 국제통화기금의 주장이다.

이를테면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대통령이 고금리 조건을 거부하는 바람에 위기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는 별도로, 국제통화기금도 최근 내부적으로 ‘일부 국가의 경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고금리 조건을 너무 성급히 제시한 것은 실책’이라고 자체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단기 투기 자금 단속할 장치 필요”

아무튼 이번 세계은행 보고서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아시아 금융 위기 처방책이다. 그 가운데 개발 도상국들이 무조건 금융 시장이나 자본 시장의 자유화를 추진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즉 개방을 추진하되, 우선 국제 투기 자본의 유출입을 규제하고 감독할 장치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번 아시아 금융 위기를 부른 주범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국제 단기 자본의 급격한 유출입을 단속할 수 있는 범세계적 메커니즘을 신설하자고 강조한 것도 특징이다.

이같은 처방은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개발 도상국들이 하루빨리 자본·금융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촉구해 온 국제통화기금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12월3일 강연에서 소로스가 “시장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다”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 국제 투기 자본의 ‘놀이터’가 되어 버린 세계 금융 시장은 분명 어떤 식으로든 수술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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