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경협 풀어 북한 끌어낸다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6.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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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4자 회담 제의 후 밀사 파견…대북 투자 확대로 대화 분위기 조성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무공) 홍지선 북한처장이 싱가포르로 출국한 때는 4월23일이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반도 평화를 위한 4자 회담과 관련해 남북 비밀 접촉이 북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이와 같은 미묘한 시점에 홍처장이 국내에 없다는 사실은 그가 4자 회담과 관련해 북한 당국자들과 접촉하고 있지 않는가라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무엇보다 그가 작년 북경 쌀회담을 성사시킨 한국 정부의 유일한 대북 창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통일원은 홍처장의 싱가포르 방문이 무공 사업과 관련된 것이라면서 4자 회담과 관련한 남북 비밀 접촉은 일절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 당국의 이와 같은 부인은 홍처장이 4월27일 귀국할 때 국제선 제 1청사에서 벌어진 사태를 보면 설득력이 없다. 정부 당국은 이날 싱가포르항공편으로 오후 5시께 도착한 그를 비행기에서 바로 시내 어디론가 빼돌렸다. 그래서 보도진은 영문도 모른 채 입국장에서 마냥 기다렸다.

정말로 홍처장이 무공 사업상 싱가포르를 방문했다면 정부 당국은 무엇 때문에 비행기에서 막 내린 그를 바로 차에 태워 빼돌린 것일까. 그가 애꿎게 남북한 비밀 접촉의 주역으로 오인되어 기자들에게 시달릴까 봐 007 영화에서나 봄직한 장면을 연출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결국 정부 당국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홍처장이 4자 회담과 관련해 제3국에서 북한측 밀사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남북 밀사’ 홍지선·최수진 싱가포르서 접촉

한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홍처장은 중국의 조선족 기업인인 흑룡강민족경제개발총공사 최수진 사장과의 싱가포르 접촉에서 북한 당국이 4자 회담을 수용할 경우, 경협 범위를 확대함과 동시에 쌀을 추가로 제공할 수 있다는 한국 정부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메시지는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이성대 위원장을 통해 북한 당국에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이위원장은 작년에 열렸던 북경 쌀회담 때도 홍처장으로부터 한국 정부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최사장과 북한 최고 당국자 사이를 잇는 역할을 했었다.

이 정부 관계자는 “홍처장이 북한 당국에 전달한 메시지는 청와대·국가안전기획부·통일원 최고위 관계자들이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이 4월16일 북한에 4자 회담을 전격 제안한 뒤 결정한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그는 작년 북경 쌀회담 때도 홍처장과 최사장 라인을 통해서 북한 당국과 주고 받은 모든 메시지는 김대통령·청와대 비서실장·통일원장관·안기부장 등 4명만이 주관했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홍처장이 북한측 밀사와 극비로 접촉한 곳이 싱가포르냐 북경이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내 언론은 싱가포르는 경유지일 뿐 그가 북한측 밀사와 접촉한 장소는 북경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는 싱가포르에서 4박5일 머물렀다는 것이 무공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이와 관련해 한 무공 고위 관계자는 홍처장이 자신의 북경 방문을 감추기 위해 4시간이나 더 걸리는 싱가포르를 경유할 정도의 위장술을 쓰지 않을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당사자인 홍처장도 귀국한 다음날인 4월28일 기자에게 “북경은 절대 가지 않았다. 싱가포르에만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굳이 자신이 북경을 가지 않았다고 강조했을까. 그 까닭은 북경과 달리 북한 당국자들이 쉽사리 방문할 수 있는 곳이 아닌 싱가포르에서는 남북 비밀 접촉이 이루어지기 불가능하다는 점을 설명하려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싱가포르에만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북한측 밀사와의 극비 접촉 혐의를 벗을 수는 없다.

그 까닭은 홍처장이 싱가포르에서 접촉한 북한측 밀사가 북한 당국자가 아니라 중국 조선족 기업인인 최수진 사장이기 때문이다. 홍처장과 최사장은 작년 6월 북경에서 열린 남북 차관급 쌀회담을 막후에서 성사시킨 남북한 밀사들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은 “홍-최 라인은 그 이후에도 남북한이 가동하고 있는 유일한 대화 통로로서 4자 회담과 관련해서도 동원되었다”라는 앞서의 정부 관계자 증언이다.
남북 시범 사업 범위, 통신·전자로 확대

그럼에도 홍처장은 자신이 4자 회담과 관련해서 북한 밀사와 극비로 접촉했다는 언론 보도는 소설이니 믿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당사자가 부인하는 상황에서 홍처장과 최사장이 싱가포르에서 만났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흑룡강민족경제개발총공사의 지사인 수진상사가 싱가포르에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홍처장이 북경이 아닌 싱가포르로 간 까닭은 최사장이 수진상사를 방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언론이 이같은 사실을 모른 채 홍처장이 싱가포르를 경유해 북경을 방문하여 북한 당국자들과 접촉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홍처장이 4월23일 싱가포르로 떠난 다음날부터 그가 남북 비밀 접촉을 위해 어디론가 출국한 사실을 알아내고 최사장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결과 최사장은 홍처장이 싱가포르를 방문한 기간 내내 흑룡강민족경제개발총공사 본사와 지사가 있는 하얼빈과 북경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홍처장과 최사장 간의 접촉 결과가 나오기는 아직 이르지만 현재로는 전망이 밝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전망의 근거는 정부가 4월27일 그동안 미루어온 삼성전자·대우전자·태창에 남북 경협 사업자 승인을 해주었다는 점이다. 정부는 당초 북한 당국이 4자 회담을 수용하면 남북 경협을 확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도 회담 수용 전에 이들 3개 기업에 남북 경협 사업자 승인을 내준 것은 정부가 북한 당국이 회담 테이블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가 이들 세 기업에 남북 경협 사업자 승인을 해준 시점이 홍처장과 최사장 간의 싱가포르 접촉이 끝난 뒤라는 점을 주의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홍처장이 최사장을 만나는 과정에서 경협을 확대하면 북한이 4자 회담을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확인한 것 같다. 그래서 정부는 북한 당국이 아직 4자 회담을 수용하지 않았는데도 이들 세 기업에 남북 경협 사업자 승인을 내준 것 같다”라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이번에 협력사업자 승인을 받은 사업은 나진·선봉 지대에 통신센터를 건립하고 북한 조선체신회사와 전자교환기를 합작으로 생산하는 것인데, 규모는 7백만달러에 달한다. 대우전자가 받은 협력사업자 승인은 이미 조성된 남포공단에 컬러 텔레비전 등 전자제품 공장을 건립하는 사업이다. 태창은 북한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에 능라888 무역총회사와 함께 5백80만 달러 규모의 샘물 공장을 건립하는 사업에 대한 협력사업자 승인을 받았다.

남북한 밀사 접촉에 이어 곧바로 정부가 이들 세 기업에 내준 협력 사업 승인은 두 가지 점에서 남북 경협에 대한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우선 정부가 그동안 고수해온 투자 규모 상한선인 5백만달러를 스스로 철회한 점이다. 그리고 경공업에만 국한했던 남북 시범 사업의 범위를 통신과 전자 등으로 확대한 점이다. 이는 북한으로 하여금 4자 회담을 수용하도록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정부가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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