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의문 남긴 '행불자의 죽음'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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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진상규명위,
1992년 사라진 노동운동가 박태순씨 '이상한 사망' 확인


지난 2월15일 오전 10시 박영순씨(39)는 일손을 멈추었다. "동생을 찾았습니다." 박씨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를 더 들을 수 없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가 행방 불명된 동생 박태순씨(실종 당시 26세)의 죽음을 알린 것이다.

1985년 한신대 철학과에 입학한 박태순씨는 지하 서클에 가입했다. 그는 1987년 학교를 휴학하고 수원 지역 노동 현장에 투신했다. 박씨는 1989년 5월20일 '이철규 열사 의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수원지방검찰청을 점거했다. 그 때문에 그는 1년6개월 동안 복역했다.

박씨는 1990년 11월 만기 출소한 뒤에도 노동운동을 계속했다. 박씨는 군대 징집을 기피해 기무사로부터 추적도 받았다. 수원 지역 ㅅ피스톤·ㅎ기계를 거쳐 박씨가 마지막으로 근무한 곳은 부천의 ㅅ기계였다. 1992년 8월29일 박씨는 공장에서 일을 마친 뒤 귀가하다 사라졌다. 그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공장 동료들은 구로역 근처에서 그와 헤어졌다고 증언했다.
진상규명위는 이같은 진술을 바탕으로 1992년 8월29일 이후 구로구청에 접수된 행려 사망자 2백12명의 신원을 파악했다. 그 결과 1992년 8월29일 오후 9시55분쯤 구로구 시흥역 근처에서 열차에 충돌해 숨진 사람의 나이와 인상 착의가 박씨와 비슷한 점을 발견했다. 조사관들은 남부경찰서에서 사고 기록을 제출받아 사망자 지문과 박씨 지문을 대조했다. 두 지문은 똑같았다. 진상규명위는 곧장 시신의 행방을 추적했다. 시신은 1992년 10월27일 경기도 벽제리 무연고 묘지에 가매장되었다가 1998년 4월20일 화장되어 용미리 무연고 추모의 집에 안치되어 있었다.

박영순씨는 지난 2월16일 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을 찾았다. 특별조사과 김학철 과장·조환진 조사관과 함께 박씨는 동생이 숨진 것으로 알려진 시흥역을 찾아갔다. 당시 시흥역 부역장이던 금 아무개씨(54)도 동행했다. 금씨는 박씨의 죽음을 처음 확인한 사람이다. 금씨가 작성한 사고 기록에 따르면, 박씨는 1992년 8월29일 오후 9시55분 시흥역에서 17.1km 떨어진 지점에서 무궁화호 열차에 치여 오른쪽 두개골이 파열되어 현장에서 숨졌다.

김학철 과장은 경찰 기록 사진과 현장을 대조해 사고 현장이 역으로부터 17.1km가 아니라 1백50m 떨어진 17-1로 표기된 지점임을 밝혀냈다. "왜 동생이 역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숨졌는지 모르겠다." 현장에서 박순영씨가 제기한 첫 번째 의문점이었다.


"국가기관 개입 여부 밝혀야"


박태순씨는 행방 불명되기 한달 전부터 형 순영씨 집에 기거했다. 순영씨 집은 석수역에서 5분 거리다. 그는 굳이 시흥역에서 내릴 이유가 없었다. 기자가 확인해 보니 1992년 시흥역에서 발생한 인명 사고는 6건이었다. 박태순씨를 제외한 나머지 5건은 모두 플랫폼에서 발생한 가벼운 사고였다. 박씨처럼 플랫폼을 벗어나 목숨을 잃은 사고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박영순씨는 또한 현장에서 발견된 동생의 소지품에 의문을 제기했다. 박태순씨가 행방 불명될 때 형 영순씨는 해외에 나가 있었고, 영순씨의 부인은 임신 중이어서 친정집에 있었다. 박태순씨는 집 열쇠만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현장에서 발견된 그의 소지품은 지하철 정액권이 전부였다.

진상규명위 김학철 과장은 "박태순씨는 행방 불명에서 의문사로 밝혀졌을 뿐이다. 그의 죽음에 국가기관이 관여했는지 이제부터 밝혀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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