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엄익준 2차장 '진승현 게이트' 연루설 내막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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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에게 '죄' 다 떠넘기기/"사정 정국 전환 노린 물타기"
죽은 자는 말이 없어서일까? 간암을 숨겨 가며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다가 유명을 달리한 국가정보원 고 엄익준 2차장이 진승현 게이트라는 오욕의 장으로 끌려나왔다.


지난 11월22일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엄씨가 지난해 총선 무렵 진승현씨가 정치 자금을 살포하는 데 개입했다고 언론에 흘렸다. 엄씨가 등장하자 언론에서 진씨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거론되는 의원은 1명에서 6명, 10명, 28명으로 늘어갔다. 있는지 없는지 모호했던 진승현 로비 리스트가 '있다'고 단정적으로 보도되었다. 여권 일색이던 연루자 명단에 야당 의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은 검찰이 물타기를 하며 사정 정국으로 몰아 가려 한다고 비난했다.


"누군가가 살려고 엄차장 팔았다"




엄차장은 정말 진승현 게이트에 개입했을까. 지난 4·13총선 때 엄차장은 국내정치 담당인 2차장, 김은성씨는 대공정책실장, 정성홍씨는 경제단 과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 계통을 보면 개입했을 여지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국정원의 한 전직 간부는 "엄차장은 남북 정상회담이 확정되자 총선 전인 4월7일 사표를 내고 한달 후 사망했다. 2월에 간암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그가 과연 남북회담에 몰두하면서도 20대 청년 실업가의 코묻은 돈을 여야 의원들에게 나눠주라고 지시했을까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북통인 엄씨는 국정원에 들어가 내내 대북 관련 업무를 했다. 민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누군가 살아 남으려고 죽은 엄차장을 팔고 있다"라고 잘라 말했다.


엄차장이 등장하기 며칠 전만 해도 권력 실세의 측근인 김 아무개 의원과 이 아무개 의원이 진승현씨와 이경자씨에게 각각 로비를 받았다고 보도되었다. 이는 증권가의 '설'이 아니라 검찰 진술서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김재환씨를 소환해 수사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의원 본인은 물론 실세 정치인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검찰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3대 게이트를 모두 축소 수사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검찰은 야당은 물론 여당 의원으로부터도 '똑바로 하라'고 뭇매를 맞고 있었다. 하지만 검찰은 진승현 게이트 재수사에 소극적이었다. 돈을 받았다는 여당 의원이 실명으로 거론되는데도 검찰은 선거자금 유포설은 수사 대상이 아니라는 식으로 넘어가기 바빴다.


이런 상황은 엄차장이 등장함으로써 완전히 뒤바뀌었다. 누군가 진승현 사건의 물꼬를 돌릴 작정이었다면 작전이 보기좋게 성공한 셈이다. 우선 국정원 경제단이 벤처 기업을 주무르며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라는 뜨거운 관심이 어떤 정치인이 얼마를 받았을까로 변질되었다. 국정원 경제단과 그들의 배후라고 의심받던 권력 실세 쪽으로 좁혀져 가던 타깃이 '흔하디 흔한' 정치인 비리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정치인 수뢰는 국정원 간부 수뢰보다 긴장감이 확연히 떨어진다. 한보사태 때도 돈 먹은 정치인들은 나중에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아 무죄가 되었다. 재수사에 소극적이던 검찰도 진승현 리스트에 대해서만은 적극 수사하자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현재 구속되어 재판받고 있는 진승현씨는 5천만원을 받았다는 김 아무개 의원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검찰 조서에도 진승현의 정치 자금 리스트는 나오지 않았다. 진승현씨 로비 자금 12억5천만원 가운데 1억5천만원만 수표이고 나머지는 현금이어서 자금을 추적하기도 쉽지 않다. 결국 구명 로비를 맡았던 김재환씨의 증언에 수사의 향방이 달려 있는 셈이다.


권력 실세와 가깝다는 김 아무개 의원의 이름도 김재환씨의 진술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김씨의 이런 진술을 확보하고 있는 곳은 검찰과 국정원 두 군데뿐이다. 김씨는 지난해 11월 검찰에서 횡령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 지난 2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가 다시 국정원 감찰실의 조사를 받았다. 김씨가 어떤 정치인의 이름을 댔는지는 오직 검찰과 국정원만이 알고 있다. 한나라당이 현상황을 사정 정국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정계는 숨을 죽이며 진승현 게이트가 어디로 튈지 주시하고 있다. 1997년 초 상도동 신구파가 서로를 죽이려고 정태수 리스트를 활용한 것과 비슷하게 동교동 신구파가 진승현 리스트를 써먹으려고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정계에서는 동교동계와 검찰·국정원이 얽혀 있는 이 사건이 내년 대선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점치고 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두고 봐라. 1월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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