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언론의 ‘펜’ 휘었다
  • 권은중 기자 (jungk@sisapress.com)
  • 승인 2002.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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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명단에 창업주 포함되자 ‘억지 주장’ 펴 눈총
지난 2월28일 ‘민족 정기를 세우는 의원 모임’(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이 국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발표하자 <조선일보>·<동아일보>와 야당이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두 신문은 반민특위 이후 처음으로 시도하는 친일 인사 선정 작업의 의미를 외면하고 기사와 사설을 통해 의원모임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의원모임이 친일 인사 16명을 추가로 선정한 것을 집중 공격했다. 16명 가운데에는 두 신문의 창업주인 방응모·김성수 씨가 포함되어 있었다. 두 신문은 독립유공자 모임인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6백92명에게는 아예 관심도 없다는 듯 다루지 않았다. 또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의원모임이 발표한 명단이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선정된 것인지 의심스럽다며 두 신문 편을 들고 나섰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약속이나 한 듯이 3월1일자 신문 1면 머리 기사로 ‘몇몇 의원이 이 작업을 진행해 온 광복회와 상의 없이 정치적인 판단으로 16명을 추가해 명단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두 신문은 ‘광복회측은 의원들이 정치적 판단으로 친일 인사를 선정하자 이런 ‘자의적 선정’에 유감을 표명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두 신문이 보도한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광복회 윤경빈 회장은 “몇몇 신문이 말하지도 않은 것을 쓰고 있다. 보도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라고 말했다. 특히 윤회장은 이들 신문이 “광복 후 지금까지 친일파 청산이 늘 정치적으로 악용되었고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될까 우려한다”라는 뜻으로 한 말을 ‘의원모임이 정치적 의도로 명단을 발표한 것을 우려한다’고 보도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광복회의 한 관계자는 “두 신문이 광복회와 정치인의 싸움을 유도하는 기사를 쓰고 있다”라고 말했다.
다음날도 ‘문제 보도’는 계속되었다. <동아일보>는 3월2일자 1면에 의원모임 자문위원들 사이에서도 16명을 넣지 말자는 의견과 포함하자는 의견이 팽팽했는데 넣지 말자는 의견이 무시되었다고 보도했다. 또 <동아일보>는 의원모임 회원인 원유철 의원 등이 명단 발표와 관련해 위임장을 낸 적도 없는데 의원모임이 일방적으로 이름을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기사만 놓고 보면 의원모임이 명단 발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명단 발표를 정치적 음모로 폄하





그러나 의원모임 자문의원들은 만장일치로 김성수씨를 포함한 16명을 발표 명단에 포함하자고 결정했다. 또 원유철 의원은 자신의 도장을 찍은 위임장을 김희선 의원에게 제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결국 두 신문은 의원모임의 명단 발표를 정치적 음모쯤으로 폄하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왜 광복회는 맨 처음부터 이들 16명을 친일 행위자에 포함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문제를 크게 만들었을까. 광복회는 1999년 친일 행위자 조사에 착수했다. 광복회는 1년간 일제 시대에 발행된 관보와 각종 자료를 모아 친일파 9백명의 명단을 작성했고, 심의위원회가 이 명단을 심의해 1차로 친일파 명단 6백92명을 확정했다. 그런데 심의위원들 사이에 친일 인사 16명을 포함할 것이냐 여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이 16명은 김성수·방응모 씨처럼 유족이나 후학들이 지금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심의회의에 참석했던 한 참가자는 “언론 보도대로 16명이 수괴급이냐 아니냐를 놓고 고민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람들을 집어넣으면 사업 자체가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더 우려했다”라고 말했다. 결국 광복회는 16명을 포함할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광복회는 친일반민족행위를 청산하자며 뜻을 같이한 의원모임에 이 판단을 넘겼다.


“일제 청산은 법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의원모임은 광복회가 만든 자료를 건네받고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뺀 채 명단을 발표할 수는 없다며 만장일치로 이들을 1차 명단에 포함했다. 광복회는 이미 1948년 만든 반민족행위자처벌법 4항 11조에 의거해 김성수씨와 방응모씨를 ‘민족지도자로 둔갑한 친일자본가’ ‘언론을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정책의 하수인’으로 각각 규정해 놓았다.


광복회의 한 관계자는 “일제 청산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모든 판단을 국회로 넘긴 것도 그런 까닭이다”라고 말했다. 김희선 의원은 “민족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명단을 발표한 것이다. 각당은 이번 명단 발표를 정쟁의 소재로 삼지 말아달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들의 바람과 달리 민주당은 이회창 총재 부친의 친일 행위에 대한 검증을 요구하고 나섰고, 한나라당도 물러날 수 없다는 듯 김대중 대통령을 물고늘어졌다. 광복 후 57년 만에 민족 정기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보수 언론과 정치권이 만드는 흙탕물 속으로 빨려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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