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가 죽였단 말인가
  •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2.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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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개구리 소년 사망 사건 ‘4대 미스터리’
"혹시라도 애들이 돌아올까 봐 택지 개발이 되고도 강제 퇴거 때까지 마을을 뜨지 않았는데….” 가족들의 한가닥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91년 3월26일 도룡뇽을 잡으러 간다며 집을 나간 뒤 실종된 우철원(당시 13세·5학년) 조호연(12세·5학년) 김영규(11세·4학년) 박찬인(10세·3학년) 김종식(9세·3학년) 군은 와룡산 계곡에서 유골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실종 신고 접수 후 처음부터 가출 사고로 속단해 초동 수사에 실패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우철원군의 일기장에서 ‘나는 두목이 되어 탐험을 해보고 싶다’는 대목을 보고 타살보다는 집단 가출에 비중을 두고 수사를 진행한 것이다. 당시 경찰의 실책은 이뿐만이 아니다. 수사본부도 사건 발생 6개월 만인 1991년 9월25일에야 꾸렸고, 와룡산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 작업은 사건 발생 7개월 만인 10월 하순께 시작했다.


유골을 발굴한 직후 경찰은 자연사에 비중을 둔 조사 내용을 발표했다.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지친 상태에서 18시부터 비가 내리자 비를 피하기 위해 유골이 발견된 와룡산 4부 능선 구릉 밑에 5명이 배고픔과 추위에 떨면서 쪼그린 채 모여 앉아 있다가 기온이 급히 떨어지면서 저체온 현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사인은 국과수 감식후 정확히 판단할 예정임.’ 달서경찰서가 작성한 수사 보고 내용이다.


그러나 발굴 정황을 볼 때 자연사라고 보기에 대단히 미심쩍다. 첫째, 실종 당시 와룡산이 아이들이 조난당할 만한 장소였는가 하는 점이다. 경찰은 유골이 발견된 와룡산 세방골이 인적이 드물고 외진 지역이라고 설명했지만, 와룡산은 해발 300m로 그리 높지 않은 데다 오르기 힘든 악산이 아니다. 마을 주민 노명균씨는 “택지 개발 전에 이 부근에 드문드문 민가 몇 채가 있었다. 6백m 거리에 고속도로가 있고, 나무가 지금처럼 울창하지 않아 밤에도 불빛을 감지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놀이터 삼아 자주 와룡산을 찾았던 아이들이 길을 잃었을 가능성은 희박한 셈이다.


소년들을 총으로 쏴 살해했다?


자연사로 추정하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이들의 유골이 왜 이제야 발굴되었느냐는 점이다. 경찰은 국내 단일 실종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연인원 32만명을 동원해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 등 48개소를 5백25회나 수색했다. 경찰은 “당시 수사 기록을 검토해 보니 어린이들이 자주 놀러가던 불미골 일대에 치중해 수색했고, 유골 발견 위치는 그 반대편에 있어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설명은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다. 또한 달서구청은 외환 위기 직후 이 지역에서 공공근로자들을 동원해 대규모로 가지 치기 사업을 했지만 그때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세 번째로, 9월27일 발굴된 상·하의 한 벌의 상태는 타살을 강하게 암시한다. 상의는 뒤집힌 채 소매 부분이 목 부분에서 뒤로 두 번 묶여 있었다. 유골은 상의 속에서 발견되었다. 하의도 무릎 윗부분이 두 번 묶인 채로 발견되었다. 당시는 5.7mm 정도 비가 오고 최저 3.3°로 온도가 떨어졌었다. 최경희씨(영규군 어머니)는 “추운 날씨에 자기 옷을 뒤집어서 소매를 묶고 바지를 벗어 묶었다는 게 말이 되나”라고 반문했다. 유골들이 30cm 정도 되는 무거운 돌 밑에서 발견된 점도 ‘타살 후 은폐’ 가능성을 높이는 증거이다.


마지막으로 현장 주변에서 실탄이 많이 발견되고 유골에 구멍이 나 있다는 점 또한 의문이다. 경찰은 현장에서 탄환 60여 개를 발견했다. 실종 당시 현장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2백50m 거리에 1995년까지 50사단 사격장이 있었다. 발굴된 두개골 5점 중 한 개에 좌우 양측에 구멍이 나 있어 이 구멍이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아니냐는 추측이 뒤따랐다. 법의학팀 관계자는 “총알을 맞은 두개골의 관통 부위에는 골절 현상이 나타나는데 골절이 없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왜 구멍이 생겼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경찰은 9월30일 ‘소년들이 총으로 살해되었다’는 제보를 입수해 군 관련 여부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 구두닦이로 일했던 한 아무개씨(43)는 “지난 7월 30대 남자가 구두를 닦으면서 ‘군 생활을 할 때 어린이 5명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말을 했다”라고 제보했다. “사격 중 소년 5명이 갑자기 나타나 2명이 총에 맞아 이 중 1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는데,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5명을 다른 곳으로 옮겨 목을 조르고 총으로 난사해 죽인 뒤 매장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그는 진술했다.


50사단, 사건 수사에 비협조


육군 50사단은 1991년 당시 부대 사격장의 위치 등을 경찰에 제대로 알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장 방문 계획도 별다른 이유 없이 취소하는 등 수사에 단서가 될 수 있는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타살 정황이 속속 드러나자 당시 수사요원 6명을 포함해 43명으로 수사본부를 꾸린 경찰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원점에서 타살 의혹을 중점 수사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경찰은 처음에는 가출로 몰아 수색을 제대로 하지 않더니 이제는 자연사로 몰아붙이고 있다. 정확한 사인 규명을 해 11년 동안의 한을 풀어달라”고 유족 대표 김현도씨는 말했다. 유족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사건의 미스터리를 풀고 사인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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