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민심 믿습니다, 믿고요”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3.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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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특검 수용’ 왜 밀어붙였나/구주류 반발에는 ‘왕따 작전’으로 맞설 듯
여당이 울고 야당이 웃는, 흔치 않은 선택을 노무현 대통령이 했다. 덕분에 청와대와 야당 사이에는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여권에는 냉기류가 흐르고 있다. 민주당 신·구주류는 당장이라도 갈라설 것처럼 서로 으르렁댄다.
정치권 밖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청와대를 비롯한 각종 인터넷 사이트는 이른바 ‘노무현 빠돌이들’(노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네티즌 용어)과 노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씨름으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현재 네티즌 여론은 노대통령이 잘못했다는 쪽이 우세하다. 어림 잡아 7 대 3 정도라고나 할까. 지난 대선 이후 네티즌이 늘 노대통령의 우군이었던 데 비추면 범상치 않다. 더욱이 그런 비판의 핵심 코드가 ‘노무현의 DJ 죽이기’ ‘노무현의 호남 배신’ 등 지역 갈등을 자극하는 쪽으로 모아진다. “DJ를 밟는다고 영남이 노무현을 지지할 것 같으냐” “노무현=경상도천국=배신자=천벌 받을 것” 하는 식이다. 이런 정서는 ‘영남 약진, 호남 소외’로 요약되는 노무현 정부의 초기 인사와 맞물리면서 더욱 악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대통령은 정말 호남을 버린 것일까. 그 역시 전직 대통령을 희생양 삼아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는 얕은 수를 두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들은 결단코 ‘No’를 외친다. 노대통령이 호남과 DJ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분리해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우선 호남의 민도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는 것이 참모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한 386 참모는 “노무현 대통령이 동교동계나 이인제 의원으로부터 구박을 받으면서도 제3 당을 만들지 않고 꿋꿋하게 민주당에 남아 있었던 것에 주목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정치 격변기 때마다 보여준 호남의 선택이 DJ에 대한 맹목적 지지가 아닌 개혁 성향에 의한 것이며, 그런 개혁성이 결국 광주 경선에서 이인제가 아닌 노무현을 선택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비록 특검법을 수용하더라도 호남 민심은 이를 배은망덕과 구분해서 받아들이리라고 기대했다는 의미이다.
호남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과 달리,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은 이른바 ‘분리론’이다. 옳은 것은 옳다고 인정하되, 잘못한 것은 철저히 차별화하겠다는 것이다. 한 측근은 “DJ의 햇볕정책이 옳은 방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투명한 절차를 확보하지 못한 점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런 소신 탓에 겉으로는 노대통령이 특검법 수용을 놓고 막판까지 고심한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일찌감치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는 얘기다.

청와대측은 노대통령이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제한적 특검론’이 DJ와 호남에 대한 노대통령의 판단을 집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DJ의 햇볕정책은 계승한다. 그러나 절차상의 문제점은 지적하고 수정한다. 호남 사람들도 DJ가 잘못한 부분까지 무조건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제한적 특검제라도 일단 탄력을 받으면 DJ 죽이기로까지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우려에 대해서도 청와대측은 고개를 내젓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북 송금액 가운데 일부를 사적인 용도로 챙겼다면 모를까, 대북 송금에 대한 정책 결정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는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노대통령 주변에서는 DJ 쪽이 특검제 수용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도 이미 그 정도 판단은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른바 민주당 구주류는 왜 반발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청와대측의 시각은 명쾌하다. 개혁 저항 세력으로 찍혀 궁지에 몰린 일부 의원들이 DJ를 볼모 삼아 호남 반발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구주류는) 이리 가나 저리 가나 도착하는 지점이 같을 텐데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다”라는 한 청와대 인사의 말에는 구주류에 대한 강한 불신이 배어 있다. 몇몇 소장파나 신주류 일각이 반발하는 것은 차기 총선에서 행여 호남표가 떨어져 나가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 청와대쪽 판단이다.

이에 따라 청와대는 두 갈래 대응책을 세워놓고 있다. 1차로 신·구주류를 막론하고 당내 반발 세력을 설득한다는 것이다. 한 청와대 고위 인사는 “청와대 정무 라인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당내 반발에 대한 조기 진화 여부가 갈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노대통령이 조만간 핵심 참모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보내 특검을 수용한 전후 사정을 설명하는 방안도 조심스레 검토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당 내부의 동교동 직계는 물론 전반적인 호남 민심을 다독이는 효과도 있으리라고 판단해서다.

그래도 설득되지 않는 강경파에 대해서는 이별을 감수하고라도 철저히 왕따 작전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번 특검법 협상 과정에서 정균환 총무를 배제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 민주당 인사는 “노대통령은 하루빨리 당 개혁안을 통과시키라며 재촉하고 있다. 그래야 총무를 합법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라고 귀띔했다. 청와대와 민주당 신주류에게 정총무가 눈엣가시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특검법 수용에 대해 정총무가 유독 강하게 반발하는 데는 이처럼 자신을 겨냥한 신주류의 칼끝을 감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노무현은 호남을 믿는다’ ‘구주류의 반발과 호남 민심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는 청와대의 판단이 얼마나 정확했는가는 내년 총선 때 판가름 날 것이다. 하지만 국내 정치를 위해 대북 외교를 지나치게 소홀히 했다는 비판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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