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신당’ 마음만 굴뚝
  • ()
  • 승인 2003.04.1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주류 중심으로 조기 창당설 모락모락…청와대는 “아직 때가 아니다”
대선이 끝나고 두어 달이 지나도록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입구에는 ‘희망 돼지’가 어른 키 높이로 수북하게 담긴 진열장이 놓여 있었다. 이 진열장은 대통령 취임식을 전후해 철거되었다. 대신 당사 로비에 희망돼지를 기리는 간단한 조형물이 설치되었다.

요즘 민주당이 꼭 이 조형물 꼴이다. 한때 개혁을 열망했던 흔적은 남아 있으되, 박제화한 열망에서는 이미 포르말린 냄새가 난다. 대선 직후 소장 개혁파 의원들이 의기 충천해 밀어붙였던 당 개혁안은 갈수록 누더기가 되어가고, 당직자들은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다.

여기에 그나마 자극제가 된 것이 최근 곳곳에서 터져 나온 신당 조기 창당설이다. 사실 민주당이 이대로 내년 총선을 치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집을 개보수하든(리모델링론), 그도 아니면 집을 허물고 나가 아예 새 집으로 이사하든(신장개업론) 민주당이 언젠가는 신당 창당 순서를 밟으리라는 것이 정가 일반의 관측이었다.

문제는 그 시기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당 안팎에서 수상한 발언들이 쏟아지면서 신당 창당이 앞당겨지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언론도 4월 신당설이니, 5월 신당설이니 하며 거들고 나섰다. 이렇게 신당 조기 창당설이 힘을 얻게 된 배경에는, 무엇보다 노심(盧心) 논란이 있었다.

잇단 신당 발언으로 ‘노심’ 논란 가열

일단은 김원웅 개혁당 대표가 나설 때부터 말이 많았다. 지난 3월4일 청와대 안가에서 노대통령을 독대하고 나온 김대표는 10일 기자 간담회를 자청해 “민주당과 한나라당 개혁파는 하루빨리 당을 떠나라”고 폭탄 선언을 했다. 이 때만 해도 민주당 의원들은 촌극이겠거니 넘겼었다. 그러나 천정배 의원이 3월24일 지구당위원장 직을 내던지고, 개혁이 무산될 경우 ‘비상한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자 의원들의 낯빛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천의원은 지난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시작되기 전 노대통령을 지지한 유일한 현역 의원이었고, 지금도 대통령과 정기적으로 독대할 만큼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정치인이다. 따라서 그의 발언에는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이강철 전 정치특보(대통령 정무특보 내정자), 염동연 전 정무특보 등 노대통령과 ‘코드가 통한다’고 알려진 측근 인사들이 일제히 가세하면서 노심 논란은 더 거세졌다. 이들은 개혁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당을 떠나 주었으면 좋겠다며 구주류에 공개적인 면박을 주고 나섰다. 이쯤 되자 대통령의 의중이 아무래도 ‘신당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이른바 조조익선(早早益善) 쪽으로 쏠리는 것 같다는 소문이 급속하게 퍼졌다.

그렇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와대가 신당 창당을 서두른다는 정황은 찾아보기 어렵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른바 5월 신당설에 대해 “지금 상황에서 절대 그런 일은 없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언해 줄 수 있다”라고 강경한 어투로 말했다.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정치 개혁도 시급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북한 핵과 경제 문제 등 당면 현안이 ‘나이스’하게 풀린 뒤 생각할 문제다”라고 말했다.

청와대가 당장 나설 수 없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먼저 당·정 분리를 천명한 대통령의 약속이 발목을 잡고 있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신당 타령이냐는 비판적인 여론도 부담이 된다. 더욱이 노대통령에게는 인위적으로 정계 개편을 추진할 돈도, 조직도 없다. 민주당 한 당직자의 말마따나 정치공학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신당을 만들 수 있었던 인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노대통령 스스로도 그럴 의지가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문희상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생각하는 정치 개혁의 요체를 권위주의 정치 및 3김식 정치(1인 보스 정치+지역주의 정치)를 청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대통령이 인위적인 정계 개편을 하겠다는 것은 명분이 서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언제까지나 지켜보고 있겠다는 뜻은 아니다. 정치 개혁이 계속 지지부진해 다른 부문 개혁의 발목을 잡을 경우 대통령도 ‘비상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때 대통령이 동원하는 것은 과거의 돈이나 조직이 아닌, 국민의 힘이다. 여야 개혁파를 포함해 개혁당·시민단체를 아우른 ‘노무현당’ 시나리오가 가시화하는 것도 이 때이다. 청와대나 민주당 신주류 핵심 인사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그 시기는 빨라도 6월, 곧 대통령의 방미 일정이 끝난 뒤일 가능성이 높다.


신주류 사정에 밝은 정가의 한 소식통은 창당 시기를 오히려 내년 초로 늦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기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노무현 학습 효과 때문이다. 노대통령이 지난해 ‘너무 일찍’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는 바람에 대선 때까지 10개월 동안 온갖 역풍에 부대끼는 과정을 경험한 만큼 내년에는 1월께 신당을 창당해 4월 총선까지 숨쉴 틈 없이 바람몰이를 해간다는 것이 이들의 구상이다.

그렇다면 최근 신주류 인사들의 잇단 발언은 당장 신당을 염두에 둔 것이라기보다 경고용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천정배 의원은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최근 언행을 신당과 연결하려는 시각에 대해 “있는 그대로 보아 달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당 개혁안이 좌초할 위기에 처해 경고음을 강도 높게 울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단 안희정씨 등 대통령 측근 그룹처럼 구주류를 공격하기보다는 신주류 내부에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구주류야 차치하고라도, 개혁을 추동해야 할 신주류 일부 집단이 오히려 딴소리를 하면서 당내 분위기가 급변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노대통령이 지난 3월18일 정대철 대표와 이상수 사무총장 등 민주당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 “민주당이 국민을 바라보는 미래지향적 정당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경고성 발언을 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개혁 부진의 책임은 상당 부분 신주류 중 당 지도부급 인사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최근 일부 네티즌으로부터 ‘신’주류가 아닌 ‘쉰’주류라는 놀림까지 받고 있는 신주류. 이들이 곧 닥칠 당 개혁안 통과 과정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민주당의 운명은 또 한 차례 휘청거릴 전망이다.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