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昌 살’에 갇힌 최병렬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3.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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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원 의원 등 친이회창계와 ‘불화’ 계속…당직자 인선도 뜻대로 못해
김영삼 정권 때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지난주 평소 친분이 있던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측에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반드시 이회창 전 총재, 서청원 의원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최대표가 어려운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최근 최대표 주변에는 이회창씨와 최대표의 관계를 걱정하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이씨의 측근 인사도 “잘 돼야 할 텐데…”라며 고민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은 겉돌고 있다. 최대표측은 지난 7월15일 이씨가 빙모상을 당해 귀국하자 여러 차례 ‘찾아뵙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나, 이씨가 확답을 주지 않아 한동안 최대표가 애를 태웠다.

이런 가운데 이씨와 친한 서청원 의원이 점차 ‘안티 최병렬’ 행보를 뚜렷이 하고 있어 주목된다. 7월21일, 중국 방문을 앞두고 인사차 방문한 것이라는 표면적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이씨가 서청원 의원과 1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눈 것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이미 한나라당 내에는 ‘최대표에 대한 서청원·창(이회창) 그룹의 조직적인 반발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7월10일 열린 한나라당 운영위원회가 조직적 반발설의 진원지였다. 이날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서청원 의원의 최측근인 김용수 고양 을 지구당위원장이 “대표가 불필요한 발언을 해 정쟁을 일으키고 있다”라며 최대표를 비판한 일이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날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은 ‘한나라당 여성 조직의 대모’라고 불리는 김정숙 의원이 여성 몫의 선임직 운영위원에 들지 못한 것이다. 예상과 달리 김의원이 탈락하고 박근혜·전재희 의원과 더불어 나경원 전 이회창 후보 특보·이계경 전 <여성신문> 사장 등 이회창-서청원 체제에서 영입된 사람이 뽑혔다.

최대표측은 김의원이 운영위원이 되지 못한 이유를 서청원 의원측이 집중 견제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김의원이 지난 대표 경선 때 최병렬 캠프에 가담해 여성표를 끌어오는 과정에서 서의원측과 극도로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당시 당내에는 김의원과 서의원 부인이 여성 당원을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들 사건이 하나의 ‘발단’이었다면, 최대표가 최근 당 사무처 국장인 ㄱ씨를 바꾸려다 무위에 그친 일은 ‘전개’에 해당한다. 최대표는 7월25일 당 사무처 인사 때 지난 대선을 앞두고 외부에서 영입한 ㄱ씨를 교체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의원·이씨와 가까운, 대선 때 선대위 핵심에 있던 인사들이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최대표에게 연일 빨간 불이 켜지는 상황에서 서의원은 최대표가 제안한 지도위원 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덕룡·강재섭 의원이 지도위원 직을 수락한 것과 대비되는 행보였다. 그는 최대표가 만나자고 한 제안에도 응하지 않았다.

최대표도 이런 사태를 우려해 대표가 된 뒤 서의원의 최측근인 맹형규 의원을 정책위 부의장에 임명하며 서의원과 화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최대표 취임 직후 유승민 여의도연구소장이 낸 사표를 아직까지 수리하지 않은 것도 그가 이씨의 최측근이라는 점을 의식한 측면이 크다. 자칫하면 ‘이회창 색깔 지우기냐’라는 말이 나올까 걱정한 것이다. 최대표가 최근 “대선 자금을 공개하는 일은 결코 없다”라며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도 ‘이회창 감싸기’의 일환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당내 분위기는 최대표가 기대하는 대로 굴러가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최대표와 서청원·창 그룹의 틈은 더 벌어지고 있는 흐름이다. 이렇게 된 데는 최대표의 ‘실수’도 한몫을 했다. 7월15일 이씨 빙모상 상가에서 “(이씨에게) 전국구 1번을 주는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라며 이씨의 정계 복귀를 바라지 않는 듯한 말을 한 것이다. 최대표는 파문이 일자 진의가 잘못 보도되었다고 해명했지만, 하필이면 조문한 자리에서 오해받을 만한 말을 했느냐는 성토가 한동안 이어졌다. 최대표는 어렵게 성사된 7월25일 ‘옥인동 회동’에서도 이같은 ‘오해’를 풀기 위해 이씨에게 자신의 발언을 적극 해명해야 했다.

그러나 이씨 주변 인사들 가운데는 진작부터 최대표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지난해 대선 후보 경선 때 최대표가 갑작스럽게 출마하며 ‘이회창 필패론’을 주장한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최대표의 진심이 무엇인지도 분명치 않다. 그는 대표 경선 과정에서 ‘내년 총선에 도움이 된다면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이회창씨를 모시겠다’고 말했지만, 이후 한 참모가 더 확실하게 이런 주장을 해야 한다는 연설문을 올렸을 때는 “한번 하면 됐지…”라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최대표와 이씨, 최대표와 서의원의 관계가 벌어질수록 한나라당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데 실패할 확률이 높다. 특히 수구 인사들이 이들을 방패 삼아 저항할 경우 내년 총선을 앞두고 큰 폭의 물갈이는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 당적을 버리거나 개혁 신당이 탄생하는 등 ‘변수’가 돌출할 경우, 이러한 갈등 구조 속에 있는 한나라당 또한 새로이 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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