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다 까자
  • 이숙이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3.11.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와대·열린우리당·한나라당이 일제히 대선 자금을 철저히 밝히자고 주장하는 진짜 이유와 노림수.
검찰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뒤집어 밑바닥까지 탈탈 털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번 뚜껑을 연 이상 어영부영 닫지는 못할 상황이다. 검찰은 11월3일 수사 확대를 공식 선언하고, 각 당 계좌 추적과 기업인 소환, 압수 수색에 나섰다.

확전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노대통령은 일찌감치 검찰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위에서 가이드 라인을 제공하던 관행도 없앴다. 이 때문에 검찰 안에서는 ‘이번이야말로 정치 검찰이라는 오명을 벗고 독립 검찰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유례 없는 국민의 성원도 채찍으로 작용했다. 검찰청에 보약이 답지하고, ‘송광수 팬클럽’ ‘안대희 팬클럽’까지 생겼다. 수사팀이 이재현 전 한나라당 재정국장에 대한 구속 영장에서 ‘이번 사건의 진상을 철저하게 밝힘으로써 불법 정치자금 요구 및 수수에 대한 반성과 고비용 정치 구조 개혁의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한 것은 이런 기대감을 반영한 것이다.

게다가 수사 대상 격인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까지 ‘끝까지 가자’고 벼르고 있다. 각자 계산법은 다르지만, 각 당이 주장하는 ‘다 까자’는 말이 단지 정치적 수사(修辭)만은 아니다.

그런 마당에 노무현 대통령까지 거들고 나섰다. 11월2일 기자 간담회를 자청한 노대통령은 “차제에 정치 자금 제도의 근본적 개혁이 이뤄질 수 있는 방향으로 수사가 돼야 한다. 검찰이 한두 건의 자금 수수에 그치지 말고 국민이 정치 자금의 구조를 다 파악할 수 있도록 전면적인 수사가 이뤄지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경제 위축’ 어쩌고 하며 SK 외에 다른 기업으로도 수사를 확대해야 할지를 고심하던 검찰에 ‘괜찮다’는 사인을 보낸 셈이다.

하지만 검찰이 정치권을 상대로 무제한 수사를 펼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0월28일 서영제 서울지검장의 빙부상 자리에서 기자들과 만난 송광수 검찰총장은 “어렵고 힘들다. 진정한 수사 독립까지는 총장 다섯쯤은 옷 벗을 각오를 해야 하는데, 내가 첫 번째가 될 각오가 되어 있다”라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검찰이 강조하는 ‘형평성 원칙’은 정치권을 다룰 비책으로 풀이된다. 10월31일 브리핑에 나선 안대희 중수부장은 한나라당 100억원을 얘기하면서 민주당(노후보측) 계좌에도 정상이 아닌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 있다고 슬쩍 흘렸다. 검찰은 또 한나라당 재정위원장실에 돈다발이 쌓여 있었다는 이재현 전 국장의 진술이 알려질 즈음 노대통령 측근인 최도술씨에게도 추가 비리가 있다는 점을 공개했다. 의도적으로라도 균형을 맞추려는 모양새가 역력하다. 여기에는 한나라당이 추진 중인 ‘특검’의 명분을 최대한 무력화하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다.
형평성 원칙은 또 수사를 전면 확대하는 데도 좋은 구실이 되고 있다. 어느 한쪽의 계좌를 추적하면 다른 쪽 계좌도 형평성을 내세워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측이 최근 SK말고 다른 5대 기업이 기부한 대선 자금을 스스로 공개하고 나선 것이나, 이상수 의원, 이화영 창당기획팀장 등 대선 당시 노후보측 재정 담당자들이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는 것도 어찌 보면 그런 검찰의 처지를 십분 활용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캐면 캘수록 열린우리당은 손해날 게 없다”

10월16일과 29일 대검 중수부에 두 차례 소환되어 조사받고 나온 이화영 팀장은 “검찰이 적어도 SK 비자금이 들고 나간 한 계좌는 확인해 놓고 있었다. 대강도 아니고 정확하게 다른 기업들이 제공한 액수를 알고 있어서 있는 그대로 확인해주고 나왔다”라고 말했다. 이팀장은 관련 영수증까지 죄다 가지고 들어갔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와 함께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계좌도 철저하게 추적해야 한다”라며 검찰을 압박하고 나섰다. 한 발짝 더 나아가 김원기 창당준비위원장은 “경선 자금까지 수사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정치권 빅뱅을 전제하고 차제에 대선자금은 물론 총선 자금·경선 자금·정당 운영비까지 정치 자금을 까발리자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이렇듯 확전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이른바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의 차이가 드러나리라는 점에서다. 이해찬 의원은 “우리 당은 이미 선관위에 신고한 총액 3백억원 안에서 어떻게 처리했느냐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지만, 한나라당은 아예 신고도 하지 않은 수백억원대 불법 자금이 드러나고 있다”라면서, 캐면 캘수록 열린우리당은 손해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은 편법은 있을지언정 불법은 없지만, 한나라당은 이미 구속되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죄질이 나쁘다는 것이다.

이의원은 삼성의 경우를 한 예로 들었다. “삼성이 지난해 12월 민주당에 10억원을 낼 때 기부금 한도가 7억원밖에 안 남았다며 3억원은 개인 명의로 냈다. 법인마다 기부금 한도가 2억5천만원이고, 돈을 낼 수 있는 삼성 계열사를 20~30개만 잡아도 50억원이 넘는 돈이 이미 다른 정당에 갔다는 얘기 아니냐.” 따라서 삼성 관계자들을 불러 조사해 보면 한나라당의 부도덕성이 더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한나라당은 10월31일 5대 기업으로부터 합법적으로 받은 자금을 공개하면서 삼성에서는 20억원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열린우리당이 확전을 바라는 또 다른 이유는 민주당 끌어들이기다. 열린우리당의 한 고위 인사는 민주당도 이제 검찰 수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민주당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 장부를 검찰이 수사하다 보면 중앙당 운영비 문제, 나아가 2000년 총선 자금까지 문제가 불거질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민주당 시절 자금 사정을 잘 아는 그는 “노관규 위원장이 장부상에만 돈이 있고 실제로는 없다며 횡령 의혹을 제기했는데, 바로 그 ‘가라 장부’가 총선 때부터 내려온 것이다”라며,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민주당에서 감옥 갈 사람이 많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의리상 차마 꺼내지 못한 얘기를 민주당이 스스로 들춰내 자기 발목을 잡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민주당 안에서조차 반발이 나왔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며, 허위 공문서 작성에 해당한다고 죄목까지 거론했다. 이상수 의원도 이와 관련해 “민주당 사무총장이 되어 보니 회계상 어마어마한 문제가 있었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지난 총선 때 민주당은 서영훈 대표·김옥두 사무총장 체제로, 동교동계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정치권 전체가 싸잡아 욕을 먹는, 진흙탕 싸움이 될 가능성도 높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국민이 그래도 겨 묻은 개와 아예 똥통에 빠진 개는 구별하지 않겠느냐”라며 도덕적 우위를 자신했다.

대선 자금 수사에 대한 한나라당의 입장은 둘로 나뉘어 있다. 최병렬 대표를 비롯한 현 지도부는 확전이 나쁘지 않다는 데 반해 대선 때 지도부, 이른바 ‘왕당파’는 수사 확대를 꺼리는 분위기다. 하지만 SK 비자금에 과거 지도부가 연루된 것으로 비치면서 주도권은 완전히 현 지도부로 넘어간 상태다.

최병렬 대표, 이회창 전 총재 버리고 가나

최대표측은 이번 비자금 정국을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본다. 어차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상황인 데다, 대선 자금에 관한 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최대표라고 보기 때문이다. 최대표 주변에서는 SK말고 다른 기업이 한나라당에 준 돈이 추가로 더 나올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래 보았자 한나라당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기 때문에 더 입을 상처는 크지 않다는 것이 지도부의 판단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당을 물갈이할 명분과 동력이 축적된다고 본다. 이번 당직 개편에서만 보아도 최대표는 지난번 당직 임명 때 왕당파의 견제로 포기했던 김문수·이재오 카드를 아무 저항 없이 관철했다.
최대표측은 최악의 경우 이회창 전 총재를 버리고 갈 수도 있다는 뜻도 내비쳤다. 최대표가 최근 비자금 수사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이나, 고심 끝에 이 전총재 부친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최대표쪽 계산에 따르면 확전은 총선을 위해서도 나쁘지 않은 카드다. 전략기획위원장을 맡은 홍준표 의원은 “SK가 한나라당에 비자금을 줄 때는 우리가 잘 나갈 때였다. 그렇다면 단일화 이후 노후보가 잘 나갈 때는 당연히 그 쪽으로 돈이 가지 않았겠느냐”라면서, 만약 그런 사실이 드러날 경우 도덕성을 강조해온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입을 상처는 훨씬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재오·김문수·홍준표 의원 등 이른바 ‘저격수 3인방’이 번갈아 가며 ‘이제는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자금을 고백해야 할 차례’라고 공격하는 것이나, 노대통령 쪽을 겨냥한 특검법안 3개를 밀어붙이려는 것도 어떻게 하든 노대통령의 도덕성에 상처를 주겠다는 계산이 작용한 것이다. 홍의원은 이를 ‘야당의 논개식 정치’라고 이름 붙였다.

이렇듯 청와대와 검찰,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일제히 ‘다 까자’를 외치는 상황이어서, 정치 자금 수사는 당분간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문제는 마무리를 어떻게 짓느냐다.

정가에는 두 가지 해법이 나와 있다. 하나는 김근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주장하는 ‘만델라식’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열린우리당 김원기 위원장이 주장하는 ‘마니폴리테’ 방식이다.
김근태 대표가 10월29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밝힌 만델라식 해법은 ‘검찰 수사→고해성사→특검→사면’ 순서이다. 즉, 현재 진행 중인 검찰 수사가 끝난 후 그래도 숨겨진 불법 정치 자금에 대해서는 정치인들이 고백을 한다. 이어 정치권 합의로 그 고백에 대한 특검을 실시한 후, 마지막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위원회’ 같은 특별기구를 만들어 국민의 동의 아래 대사면을 하자는 것이다. 이 만델라 방식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양심에 기초한 화해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휴머니즘을 깔고 있다. 기존 정치인이라도 사면을 받으면 그대로 정치권에 남아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에 반해 김원기 위원장의 마니폴리테 해법은 ‘처벌’과 ‘퇴출’에 무게 중심을 둔다. 검찰이 수사하고, 미진하면 특검을 해서라도 모든 비리를 밝힌 후 잘못이 있는 사람은 정치권에서 퇴출하자는 것이다. 김위원장의 ‘정치권 빅뱅’ 발언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사면이냐 퇴출이냐, 아니면 제3의 방식이냐를 놓고 검찰 수사 이후 정치권은 다시 한번 출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마지막 단계는 결국 획기적인 제도 개혁이 될 수밖에 없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예전처럼 미적거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혼란’은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