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식 ‘원 톱 체제’의 위기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0.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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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 성공 불구, ‘내치’ 혼란 잇따라… “시스템 플레이 의한 개혁 시급”
위기설이 전파되고 있다. 언론이 부추긴 측면도 있지만, 의사 파업 평화적 타결과 롯데호텔 노조 강제 진압이 대조되면서 민심 이반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집권 중반기를 맞는 정권에 위기설이 번진다는 것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심각한 일이다. 현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해온 ‘개혁’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위기설이 불거지고 있다는 점은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정부도 더 간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청와대 박준영 대변인은 몇몇 언론의 사설을 직접 지칭하면서 “과도기적 진통을 ‘민심 흉흉’이나 ‘통치 부재’라고 몰면서 마치 정부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유감이다”라고 항변했다. 그는 또한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 결과에만 매달려 다른 국정을 무시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내치(內治)와 외치(外治)를 별개로 보는 것은 바른 현실 진단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현정부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한 정치학자는 “사회가 다원화할수록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이 충돌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라면서 노조나 의사 등의 집단 반발 움직임을 심각하게 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현재의 사태는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이라는 것이 여권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현재의 사태 전개가 위기설을 단순한 ‘설’로 그치게 하지 않을 개연성마저 보이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정부는 집단 반발이 예상되는 개혁 과제들을 대부분 총선 이후로 미루었다. 이제부터가 김대중 정부의 개혁 정책이 본격적으로 집행되는 시기인 셈이다. 개혁을 집행할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1년 반 남짓. 시간은 촉박한데, 개혁은 집단적 저항이라는 벽에 부딪혀 있다. 더구나 올해 후반기에는 세제 개편, 재벌 개혁, 국민 기초 생활 보장제 시행 등 굵직한 개혁 조처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들 개혁 조처는 모두 시행 과정에서 집단적 저항에 부닥칠 공산이 큰 사안들이다. 이른바 ‘내치 혼란’ 사태가 계속될 개연성이 농후하다.

DJ의 국정 운영 능력은 그동안 높은 점수를 받아 왔다. 그러나 점수의 대부분은 통일·외교 영역이나 환란 극복 등 외치의 성과를 통해 얻은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은 외치 성공의 클라이맥스였다. 문제는 대통령의 국정 운영 점수가 외치와 내치를 단순히 합산해 매겨질 수는 없다는 점이다. 외치에서 100점을 맞더라도 내치에서 0점을 받으면, 그 곱은 0점일 수 있다는 사실을 현정부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왜 외치는 잘 되어가는데 내치는 삐걱거릴까.

민주당의 한 의원은 우리 사회가 아직 합리적인 실용주의를 받아들일 토대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DJ는 실용주의자이다. 합리주의가 통하는 국제 무대에서는 그의 실용주의적인 입장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내치에서 점수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아직 합리적인 실용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하고 토론과 타협을 야합이라고 보는 사회에서는 실용주의가 설 자리가 없고, 따라서 내치의 위기는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 이 민주당 의원의 분석이다.

“정권의 태생적 한계에도 원인”

소수 정권의 태생적 한계가 내치의 혼란을 불러온 근원이라는 지적도 있다. 민주당 내에서 개혁파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집권을 위해서 불가피했던 DJP 연대가 집권 이후에는 DJ에게 짐이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국무총리와 각료의 일정 부분을 자민련에 할애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DJ 정권의 정체성 위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국회에서도 자민련과의 공조 때문에 민주당은 독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런 정체성 위기가 내치 위기를 불러온 원인이라는 것이다.

조희연 교수(성공회대·사회학)는 정체성 위기의 원인을 DJ의 소수 정권 콤플렉스에서 찾고 있다. 조교수는 개혁의 장벽으로 경제 위기, 기득권 세력의 저항, 소수 정권의 한계, 지역주의 장벽을 들면서 개혁을 연착륙시키는 데 너무 집착한 결과 개혁적인 사회 분위기 조성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친개혁적인 사회 기풍이 유지되고, 국민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개혁하자는 목소리가 분출되어야 하는데, 현재는 그런 기풍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서는 민주당 의원들도 인정하고 있다.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집권 초기에 개혁 분위기를 사회에 확산하기 위해서도 인사청문회나 특검제를 즉각 실시하는 가시적인 조처들을 취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야당 때의 주장마저 철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점들 때문에 국민의 정부가 실제적인 개혁 정권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국민들을 설득할 기회를 놓쳐버렸다”라고 분석했다. “개혁 기관차에 범퍼가 없다”

불신 받는 정부와 불신하는 국민, 이 양자의 대립은 개혁할 사회 기반을 균열시키는 결과까지 초래하고 있다. 현정부가 보수 기득권층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 세력으로부터도 협공당하고 있다는 점이 사태의 심각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롯데호텔 노조 강제 진압 등 현상적인 정부의 실책 때문에 더욱 증폭되고 있다.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DJ 정권은 개혁 정권이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관계자들을 만나면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스스로 개혁 정권임을 자부하면서도 국민들에게 개혁 정권으로 비치지 않는다는 점이 DJ 정권에게는 뼈아플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이번 기회에 민주당 지도부와 정부를 개혁적인 인물들로 확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초조감을 버려야 한다. 개혁적 인사들을 전면에 내세워 적당주의를 청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다른 의원은 “민심이 떠난다면 큰일이다. 과잉 진압 책임자를 즉시 처벌해야 한다. 김태정 검찰총장 처리를 미적거리다가 이 정권이 얼마나 큰 위기를 맞았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내각·청와대·당 모두 역사에 책임지고 온몸으로 전력 투구할 사람이 없다. 스스로 총대를 멜 사람이 많아야 한다. 개혁 기관차에 범퍼가 없는 것이 문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범퍼 없는 개혁 기관차’는 어쩌면 DJ 스스로 초래한 측면이 강하다. 문제는 DJ의 ‘원 맨 플레이’에 있다고 조희연 교수는 지적한다. 최근의 의사 파업 해결 과정이 대표적인 사례다.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실의 한 관계자는 “영수회담 직전까지도 의사 파업이 전격적으로 타결될 가능성이 있다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전국민적인 관심 속에서 벌어졌던 의사 파업이 주무 부서 담당자도 모르는 순간에, 오로지 DJ의 결단에 의해서 전격적으로 풀려버린 것이다. 금융노조가 주무 부서 장관까지 불신하면서 DJ와의 직접 해법을 모색하고, 또한 DJ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시하는 것도 이런 DJ식의 일처리 방식이 국민들에게까지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 맨 플레이가 계속되면 책임도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DJ는 시스템 플레이를 허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직접 챙기는 스타일이다. 실패할 경우 바로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라고 우려했다. 정대화 교수(상지대·정치학)는 “대통령 1인에 의한 비정상적인 카리스마적 지배는 제도에 의한 지배로 전환되어야 한다. 아울러 권력 분산화를 추구해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대통령 1인에 의존한 지도력이 아니라 개혁 주체의 집단적 힘에 기초한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정교수는, 대통령이 개혁 과정에서 제기되는 사회 일각의 반대와 저항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장기적으로 형성될 국민의 불만을 두려워하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주당 이재정 의원도 “대통령의 개혁 의지·방향·통치 철학을 내각이나 당이 충분히 실천하기 위해서도 당을 개혁적인 국민 정당으로 하루빨리 탈바꿈시키고, 8월 개각 때 개혁적 인사들을 전진 배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내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원 맨 플레이 전략을 ‘올 코트 프레싱’ 전략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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