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은 뚝심으로 우뚝 선 ‘바모’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06.0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당 당권 거머쥔 바른정치모임, 결속력·개혁성·능력 남달라
석가탄신일인 지난 5월26일 저녁. 오페라 <루치아>가 공연되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열린우리당 당선자 20여 명이 부부 동반으로 속속 나타났다. 언뜻 보면 무슨 친목 모임인가 싶지만, 면면을 보면 지난 원내대표 경선 때 천정배 후보를 적극 도운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당초 이 날 행사는 정동영 전 의장이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최근 입각 문제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때문인지, 정작 정씨는 참석하지 않았고, 대신 신기남 의장이 행사를 주도했다.

단순한 선거 뒤풀이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는 이 모임이 주목되는 이유는, 앞으로 여당의 주류로 떠오른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 체제를 뒷받침하는 최대 계파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이들은 이해찬 후보에 비해 열세라던 천정배 후보를 막판 뒤집기로 원내대표에 당선시켜 위세를 과시했다.

당과 원내를 장악한 천·신·정 체제의 모태는 1997년 11월에 결성된 ‘21세기 푸른정치모임’이다. 그 전해 총선에서 DJ의 젊은피 수혈에 따라 등원한 정동영 신기남 천정배 추미애 김민석 등 초선의원 21명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에게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불어넣기 위해 이 모임을 만든 후 전국 유세에 나섰다.
DJ 당선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은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에 정치개혁 건의서를 제출하고, 시민단체와 연대해 전국 순회 간담회를 여는 등 국민의정부가 개혁 작업에서 지지부진하지 않도록 계속 문제를 제기했다.

2000년 총선에서 당선된 천·신·정 재선 그룹은 푸른정치모임에 개혁 성향인 386 초선 당선자들을 포함시켜 ‘바른정치모임’(바모)을 만들기로 하고 ‘바른정치실천연구회’라는 이름으로 국회에 등록했다. 국회에 모임이 등록되면 일정액의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핵심 멤버로는 천·신·정, 정동채·김한길·정세균·이강래·추미애·김민석·이미경 등 재선 그룹과 이강래·이종걸·송영길·임종석 등 초선 그룹이 참여했다.

이들이 첫 번째 표 대결을 경험한 것은 2000년 8월. 정동영 의원을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시키면서다. 내부 토론을 통해 대표선수를 정동영으로 합의한 이들은 ‘당을 확 바꾸겠다’는 슬로건을 내건 정후보의 최고위원 당선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고, 결국 당선시켰다. 그 과정에서 독자 출마를 감행한 추미애 의원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지만, 아무튼 핵심 멤버가 지도부에 진출함으로써 ‘바모’는 독자 세력화를 향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2000년 11월 마침내 정동영 의장이 청와대 만찬에서 ‘권노갑 퇴진’을 거론하며 정풍운동의 불을 당겼다. 이로 인해 당시 당을 장악하고 있던 동교동계와 치열한 갈등이 벌어졌다. 하지만 바모는 쓰시마 투어(2001년 1월), 강원도 투어(2001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군 발자취 순례(2001년 8월), 베트남·캄보디아 여행(2001년 12월) 등을 통해 ‘개혁 적자’로서 결속력을 다졌다.

2002년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바모는 잠시 딴살림을 차렸다. 천정배 의원은 일찌감치 노무현 지지를 선언했고, 일부는 역시 경선에 나선 정동영 후보를, 그리고 일부는 관망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후보가 대선 후보로 결정된 후에는 다시 하나로 뭉쳐 노후보 선거운동에 올인했다. 당시 노·정 후보 단일화 흐름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한목소리를 낸 것에 대해 이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민주당에서 분당할 때 이들은 일부 중진이 내세운 통합론 대신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기득권 포기, 선명 신당의 필요성을 고집했다. 그리고 결국 그 자산을 바탕으로 열린우리당의 당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장한 바모의 특성을 분석해보면 이렇다. 우선 결속력이 매우 강하다. 의원 각자의 개성은 뚜렷하지만, 오랜 기간 내부 토론을 통해 정치적 행보를 통일해온 데다, 어려움이 닥쳐도 이를 조직의 힘으로 극복해낸 경험을 축적해 연대 의식이 상당히 강한 편이다. 이번에는 누구, 다음은 누구 식으로 서로 역할을 나누고 공동으로 미는 시스템이 정착되어 정치적 시너지도 대단하다. 한 멤버에 따르면 쓰시마 투어 등에 나섰을 때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의형제나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배신하지 말자’ 따위의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외국 여행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자주 부부 동반으로 모이는 덕에 부인끼리도 따로 모임을 가질 정도로 절친하다. 또 보좌진 사이의 유대감도 끈끈한데, 이번 천정배 후보 선거 때도 공동 사무실을 내고 각 의원실 참모들이 함께 모여 수시로 대책회의를 열었다.

멤버들이 각자 특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이를테면 천정배 의원은 현안을 끄집어내 발제자 역할을 하고, 신기남 의원은 모임 소집과 사회자 역할을 하고, 정동영 전 의원은 모임 분위기를 좌우하거나 당내 다른 그룹과의 의견 조율을 담당하며, 정동채 의원은 과거 동교동이나 DJ와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해서 대립각을 무디게 만들었고, 김한길 의원은 문제의식을 현실 정치에 써먹을 수 있게 다양한 아이디어로 내놓는 식이다.

지난 원내대표 경선 때는 이제 3선이 된 바모 핵심에다 재선 그룹인 이종걸·송영길 의원, 초선에서 염동연·박명광·최 성·임종인 당선자가 적극 움직였다는 후문이다.

큰 꿈 꾸는 ‘천·신·정’ 분열할 수도

하지만 바모가 언제까지 이런 결속력을 유지할지는 불투명하다. 첫째 천·신·정 세 사람이 모두 큰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자칫 각개약진을 통한 내부 분열이 언제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모를 일이다. 특히 남북 문제나 이라크 파병, 사회 복지 분야 같은 각론에 들어서면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두 번째는 외부의 견제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중진과 재야파가 대거 이해찬 후보를 지원한 것이나, 최근 문희상 특보가 여권 지도부를 향해 쓴소리를 내뱉은 사건은 상징적인 예다. 자칫 ‘청와대 대 천·신·정’의 일대 격돌로 번지는 것도 불가능한 시나리오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모는 정치인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핵심 권력을 차근차근 쟁취해 가는 새로운 모습을 보임으로써, 초선 의원 사이에 ‘그런 모임 한번 만들어봤으면…’ 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