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리더 시리즈 ⑥ / 김현미 열린우리당 대변인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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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철살인 ‘김부’ 17년 벼린 입 열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김부’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다. 1998년 1월20일부터 2003년 2월25일까지 5년 1개월간 내리 ‘부대변인’만 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대변인이 10명도 넘게 갈렸다. 정동영 김영환 김민석 김한길 전용학 이낙연 문석호 의원이 다 그녀를 거쳐 간 금배지들이다.

그런 그녀가 드디어 ‘부’자를 뗐다. 스물다섯 살에 야당 말단 당직자로 들어가 17년 만에 과반 여당의 대변인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다.

노대통령은 열린우리당 당선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지난 5월29일 “김현미씨는 한번 안아봅시다”라며 그녀를 반갑게 껴안았다. 사흘 후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인사차 동교동을 찾았을 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현미씨가 국회의원이 된 걸 보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라고 덕담을 건넸다. 이처럼 전·현직 대통령이 유독 김씨의 당선에 관심을 보낸 것은 그만큼 그녀의 ‘정당사’가 화려하다는 의미다.

연세대 ‘권’ 출신인 김의원은 대학 졸업 후 부평의 한 형광등 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그녀의 신조는 ‘(노동)운동을 하지 않는 삶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 하지만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6개월 만에 공장 일을 그만두고 1987년 DJ 비서실에 들어가 당보를 만드는 일로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그로부터 10년, 김씨는 그야말로 ‘정권 교체만을 바라보고’ 당 일에 헌신했다. 1987년 대선 때는 전국 유세장을 다 쫓아다니며 ‘DJ의 말씀’을 당보에 담아냈고, 1992년 대선 때는 이우정 의원의 비서로 있으면서 선거를 도왔다.

1995년 김씨는 정당 사상 처음으로 ‘TV 모니터팀’을 만들자고 제안해 성사시켰다. 신문보다 방송 뉴스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야당에 비우호적인 방송 뉴스가 왜곡되는 것을 감시하고 바로잡자는 취지였다. 매일 주요 뉴스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그녀의 정치 감각·언론 감각은 웬만한 정치인 찜쪄 먹을 정도로 무르익었다.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하기까지, 그녀가 만든 언론 분석 자료는 당 안에서 교본이 되다시피 했다.

‘원정 출산’ 등 숱한 유행어 남겨

DJ 당선과 함께 박선숙 부대변인이 청와대로 차출되면서 김씨는 자연스레 부대변인 자리를 물려받았다. 당시 박선숙 부대변인이 했던 말을 그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나는 첫 여성 부대변인이라는 프리미엄을 누렸다. 두 번째인 김현미씨가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여성 부대변인 몫이 계속 유지되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 김씨는 남들이 오히려 그녀의 가정을 걱정해줄 정도로 일에 몰두했다. 박상천 원내총무는 휴일에 골프장에 나갔다가 ‘김부’의 전화를 받고 공치기를 멈추기 일쑤였고, 김한길 의원의 부인 최명길씨 역시 ‘대변인 어디 계시냐’는 ‘김부’의 독촉 전화에 시달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2002년 대선 때는 하루도 쉬지 않고 노무현 후보를 따라다닌 탓에 노후보로부터 “김현미씨는 자유 부인입니까?”라는 웃지 못할 질문을 듣기도 했다. 그녀는 당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해 아들 둘을 둔 아줌마다.

김의원이 가진 또 다른 강점은 탁월한 순발력이다.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 ‘원정 출산’이라는 유행어는 어느 날 새벽 그녀가 한 석간 신문 기자의 전화를 받고 잠결에 내뱉은 말에서 비롯되었다. 그녀의 논평은 단검으로 의표를 찌르듯 간결하고 예리하기로도 유명하다. 엘리트 이미지를 벗으려는 이회창 후보가 시장에서 오이를 그냥 먹었다는 기사를 보자마자 “일반 서민은 오이를 반드시 씻어 먹습니다”라고 점잖게 꼬는 식이다. 이런 촌철살인 때문에 상대 당조차 ‘김부’의 실력만큼은 인정하는 분위기다.

노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후보 시절 텔레비전 토론을 끝내고 나올 때면 노후보는 그녀의 표정부터 살피곤 했다. 마지막 텔레비전 토론이 있던 날 ‘토론에 만족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노후보가 “김현미 부대변인이 웃는 걸 보니 제가 잘했나 보네요”라고 대답했을 정도다.

당 부대변인·당선자 부대변인·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정무비서관을 거치는 동안 그녀가 알고 지낸 기자는 얼추 4백~5백 명이다. 그녀가 처음 언론 분석을 할 때 언성을 높이며 싸운 기자들 중에는 이미 정치부장이나 논설위원이 된 사람도 적지 않다. 국내언론비서관 시절에는 ‘조·중·동’과의 갈등으로 수많은 소송을 진두 지휘하는 악역을 맡기도 했다.

직설적이고 만만치 않은 성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자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다. 하지만 기자들과 친하다는 것이 한때 그녀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참여정부 초기 청와대 대변인 1순위로 거론되던 그녀가 막판에 배제된 데에는 언론과 거리 두기를 원칙으로 한 노대통령 측근들의 견제가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정동영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4·15 총선 직전 정동영 의장에게 가장 먼저 ‘모든 것을 버리라’고 건의했을 정도로 냉정한 그녀는 17대 국회도 범상치 않게 시작했다. 대통령 탄핵의 주역인 박관용 국회의장의 환영사가 웬 말이냐며 초선 의원들의 보이콧을 주동한 것이다. 17대 총선에서 공천 심사를 담당해 초선부터 중진까지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그녀의 너른 발이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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