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노동 무임금” 금배지 떼어라
  • 李叔伊 기자 ()
  • 승인 1998.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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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장기 결석자 ‘특별 대책’ 마련해 직무 유기 막아야
경기도 시흥에서는 요즘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이 지역 출신 한나라당 제정구 의원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소문이다. 당 안팎의 경쟁자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보궐 선거 어쩌고 하는 소리까지 나온다.

이에 대해 제의원측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고 일축했다. 제의원이 독한 폐결핵에 걸린 것은 사실이나 ‘죽을 병’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가 검사를 받은 안산의 한 내과와 서울대 병원은 제의원에게 몇달 푹 쉬라고 처방했다.

병원측으로부터 장기 휴식 명령이 떨어지자 제의원은 한때 심각하게 ‘의원직 사퇴’를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두 달도 아니고 몇 달을 쉬어야 한다면, 마땅히 의원 직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주위 사람들이 강력하게 만류했다. 회사원도 직장에 다니다 병을 얻으면 휴직하는 것이 당연한데, 의원이라고 병가 얻는 것이 무슨 문제냐는 논리였다.

제의원은 일단 두세 달 쉬면서 몸을 추스르겠다며 8월 초부터 휴식에 들어갔다. 하지만 의정 활동에 대한 왕성한 의욕 때문에 아무래도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그는 8월31일로 예정된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 새로 배정된 국회 산업자원위원회에도 곧 참석할 계획이다.

4년 내내 결석해도 세비 받으며 의원 직 유지

제의원의 와병을 계기로 정치권 일각에서는 ‘장기 결석자’에 대한 국회 차원의 특별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국회의원 신분 보장도 좋지만, 사실상 의정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면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현재 ‘건강’을 이유로 국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의원은 4∼5명에 이른다. 한나라당 최형우 의원은 97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래 1년6개월 가까이 의정 활동을 못하고 있다. 지난 7·21 보궐 선거 때 부산에 내려가 측근 후보를 지원하기도 했지만, 언어 기능이 회복되지 않아 한동안 정치 재개는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 측근의 설명이다. 같은 당 조중연 의원은 폐암으로 투병 중이다. 당 지도부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지난 8월3일 국회의장 경선장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초췌했다.

자민련 김복동 의원은 디스크를 치료하느라 몇 달째 일본에 머무르고 있다. 정확한 건강 상태는 확인되지 않지만, 자민련이 한 표에 목숨을 걸었던 국회의장 투표에도 참석하지 못한 점으로 미루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노승우 의원은 경우가 좀 다르다. 그는 지난 3월5일 중국 전인대를 참관할 목적으로 출국한 후, 중국에서 허리 디스크를 치료한다며 여지껏 귀국하지 않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노의원이 한보로부터 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이어서, 병을 내세워 ‘도피 외유’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따가운 눈총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짧게는 두세 달에서 길게는 전체 임기의 절반 가까이 국회를 비워도 이들 장기 결석 의원을 제재할 방법이 없다. 현행 국회법에 따르면, 국회의원이 사고로 인하여 국회에 출석하지 못할 때는 청가서(請暇書)나 결석계를 내도록 되어 있다. 청가서만 내면 당선된 다음날 사고가 나서 4년 내내 의정 활동을 못해도 세비를 꼬박꼬박 받으면서 국회의원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
만약 청가서도 내지 않고 무단 결석한 경우에는 의원 세비 가운데 특별활동비가 깎인다. 하지만 하루 특별활동비는 1만8천원꼴. 그것도 본회의나 상임위원회가 열린 날 결석한 경우만 공제하게 되므로 올해처럼 아예 국회가 안 열린 때는 세비가 깎이는 일도 없다. 이렇듯 피해가 없기 때문인지, 장기 결석자 가운데 노승우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들은 아예 청가서도 내지 않았다. 노의원은 90일 청가서를 냈다가 최근 1백20일로 연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 대해 국회의 한 고위 관계자는 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국회의원의 의무가 매일매일 유권자를 대변하는 일인데, 그런 책임을 진 국회의원이 명백하게 직무를 유기하고 있어도 눈 감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다른 한 고위 인사는 이를 한국인 특유의 온정주의가 빚어낸 잘못된 관행이라고 꼬집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원칙을 내세웠다가 자칫 몰인정한 사람으로 몰릴까 봐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라며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정치권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시민단체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신병 치료를 이유로 의원 직을 사퇴한 의원은 단 한 사람도 없다. 15대 국회 들어서만도 조철구·이병희·권수창·남평우 의원이 지병으로 사망했지만, 이들은 모두 죽을 때까지 의원 직을 유지했다.

국회의원이 건강 때문에 의정 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객관적으로 판정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국회의원이 장기간 의정 활동을 수행할 수 없을 경우 본인 스스로 사퇴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모양새도 좋고, 그것이 책임 있는 정치인의 자세라는 얘기다. 국회의원의 사퇴는 궁극적으로 지역구민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유권자들이 해당 의원을 끝까지 대표로 인정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퇴 압력을 넣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의원이 일정 기간 국회에 나가지 않을 경우 자동적으로 의원 직을 상실케 하는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경 주장도 나온다. 명백한 처벌 규정이 있어야만 국회의원의 직무 유기와 국민의 혈세 낭비를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국회의원 출석표 공개해야

그러나 이런 장기 결석자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려면 먼저 국회의원들의 출석 기록부터 공개되어야 한다. 국회 사무처는 본회의와 상임위원회에 참석하는 의원들을 빠짐없이 점검하고 있다. 그러나 출결 상황을 공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국회법 어디에도 공개·비공개에 대한 규정이 없지만, 출석표를 공개할 경우 결석률이 높은 의원들이 강하게 반발할 것을 우려해 어느 누구도 총대를 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시민단체가 의원 평가를 위해 출석표를 공개하라는 공문을 여러 차례 국회에 보냈지만, 대답은 늘 ‘공개 불가’였다.

출석표가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건강에 문제가 없는데도 상습적으로 회의에 빠지는 의원이 많다. 해외 출장이 잦은 한 무소속 의원은 15대 들어 국회에 참석한 횟수가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한다. 각당 총재급 의원들의 의사당 출입이 뜸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미국의 경우 국회가 열린 다음날 곧바로 출석표와 특정 법안에 대한 찬반 여부가 공개된다. 이는 유권자들이 의원의 활동을 평가하는 주요 잣대가 되고 있다. 다행히 신임 박준규 국회의장은 의원들의 출석을 공개하는 데 적극적이다. 구창림 비서실장은 ‘투명한 국회상을 정립하려면 의원 개개인의 출석과 찬반 공개가 필수라는 것이 박의장의 뜻’이라며, 이번 정치개혁특위에서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의회(Parliament)는 프랑스어로 ‘말하는(Parler) 곳’이라는 뜻이다. 국회에 나와서 말하지 않는 의원은 존재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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