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 정국 벗어날 DJ의 3단계 처방
  • 李叔伊 기자 ()
  • 승인 1998.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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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당, 민심 이반에 당혹…3단계 경제위기 처방 강구
‘대기업의 대량 해고 사태를 방치할 경우 불길한 예감이 든다.’ 국민회의 김영환 정세분석위원장이 최근 한 보고서에 쓴 내용이다. 정세 분석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추상적인 ‘불길한 예감’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연의 일치인지, 답은 같은 여권인 자민련의 정세 보고서에 나와 있다. 지난 4월22일 자민련 정세분석실은 ‘실업 대란에 따른 노동계의 집단 행동 및 6월 지방 선거를 겨냥한 노조의 정치 세력화가 가뜩이나 어려운 여권의 정국 운영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다. 정국 흐름에 민감한 국민회의나 자민련의 정세 분석 담당자들이 한결같이 최근 정세가 여권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6·4 지방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5월 여권 위기설’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국민회의의 한 고위 관계자는 최근의 경제 난국에 어설프게 대처했다가는 ‘북풍’ 꼴이 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북풍의 피해자는 당연히 DJ와 국민회의라고 인식하고 정부·여당이 북풍 응징에 나섰다가 난데없이 튀어나온 ‘이대성 문건’ 파문으로 한동안 역풍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번 IMF 정국도 상황이 비슷하다. 여권은 외환 위기의 책임이 전적으로 구여권, 즉 한나라당에 있다며 자신들은 소방수라고 자신만만해 하지만, 당장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국민들의 불만은 점차 여권의 ‘대응 미숙’ 쪽으로 옮아 가는 형국이다. 지난해 말의 외환 위기는 김영삼 정부의 실정이지만, 코앞에 닥친 실업 대란은 김대중 정부의 무능 때문이라는 ‘책임 분리론’이 힘을 얻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실업 대란의 공습 경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자 정부·여당도 적극적인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6·4 지방 선거를 앞두고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경제 위기 처방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경제 위기의 책임이 구여권에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다시 한번 환기하고 △국민 설득과 노동계 달래기를 통해 정국을 안정시키며 △경제 개혁·구조 조정·실업 대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 가시적 성과를 거두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인 책임 규명은 ‘외환 위기 → 구조조정 → 실업 대란’으로 이어진 경제 위기의 고리가 결국 한나라당의 실책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명확히 짚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최근 파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감사원과 검찰의 환란 규명, PCS 특혜 의혹 수사, 기아 로비 수사 등 각종 문민 비리 수사가 이런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 야권에서는 이를 구여권에 대한 표적 수사이자 정계 개편을 겨냥한 압박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여권은 ‘책임 규명’이 주목적이라고 말한다.

책임 규명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 청문회는 여권이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예비 카드이다. 자민련 수뇌부의 박태준 총재를 비롯한 몇몇 인사는 가능한 한 빨리 청문회를 열어 책임 소재를 밝혀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청문회로 야기될 정국 혼란이 경제 사정을 더욱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여권은 청문회 시기를 늦추고 있다. 여권은 검찰 수사가 끝난 후 민심의 불만이 극에 달했을 때 마지막 카드로 경제 청문회를 꺼낼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로, 노동계 달래기와 국민 설득을 위해 여권이 추진 중인 안이 제2기 노사정위원회 출범과 국민과의 텔레비전 대화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4월20일 경제 6단체장을 만난 데 이어 21일에는 한국노총, 22일에는 민주노총 지도부와 만났다. 김대통령이 바쁜 일정을 쪼개 이들을 직접 만나 공을 들이는 것은 그만큼 노사정위원회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청와대측은 정리 해고로 인한 노·사 마찰을 최소화하고 본격적인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2기 노사정위원회를 띄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대통령은 2기 노사정위원회 출범을 전후해 국민과의 텔레비전 대화를 갖고 직접 국민을 설득할 계획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이대로는 안된다” 조기 정계 개편 선회

그러나 청와대측은 책임 규명과 국민 설득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정부·여당은 가능한 한 빨리 경제 개혁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애쓰고 있다. 우선 당정이 ‘실업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한 공격 대형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 국민회의는 정부가 추진하는 실업 대책에 발맞추어 ‘실업대책정책회의’를 구성했으며 4월28일과 29일에는 IMF 경제난 극복을 위한 당직자 연수를 실시했다. 이에 앞서 청와대 비서진도 경제 연수를 했다.

김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인사들이 부쩍 재벌 개혁을 채근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재의 정국 불안이, 재벌 개혁이 미진한 상태에서 국민에게만 고통을 분담하라는 것 아니냐는 국민들의 분노에서 비롯되고 있으므로, 1∼2개 대기업만이라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여권은 강력한 경제 개혁과 정국 안정을 위해 조기 정계 개편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여권의 정계 개편은 2단계로 진행될 전망이다. 우선 야당 의원 10여 명을 개별 영입해 5월 중에 있을 국회의장과 상임위원장 배분에서 다수 당의 이점을 살리고, 2단계로 6월 지방 선거에서 압승한 후 대대적인 정계 개편을 시도해 김종필 총리 임명동의안을 통과시킨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여권의 이런 전략은 곳곳에서 암초에 걸릴 가능성이 많다. 벌써 노동계가 제2기 노사정위원회에 불참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가 하면, 야당도 정계 개편에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취임 이후 최대의 시련에 봉착한 여권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김대통령의 정치력이 또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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