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계, 해체의 길 들어서다
  • 안철흥 기자 (epigon@e-sisa.co.kr)
  • 승인 2001.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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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노갑 위원 2선 퇴진… 핵심 인사들 당직 사퇴 불가피

사진설명 운명 엇갈린 '두 형님' : 권노갑 위원(왼쪽)이 사퇴하고 한화갑 위원은 살아남았지만, 한 위원이 동교동계 대표로 활동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민주당 권노갑 최고위원이 12월17일 밤 전격적으로 사퇴 성명을 발표했다. 정동영 최고위원의 '권노갑 2선 퇴진' 발언이 나온 지 꼭 보름 만이다. 이로써 민주당내 권력 갈등은 봉합 국면에 들어갔다.

'순명'(順命). 권위원이 사퇴 성명에 앞서 고심 끝에 고른 단어가 이것이다. '40년간 그래왔듯이 나라와 당과 대통령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이 내 숙명이다.' 권위원은 사퇴 성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구당 위원장직 사퇴·국회의원 불출마·최고위원 불출마 등 지난날의 사례도 상기시켰다. 이번 일도 과거의 '살신성인'과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셈이다.

권위원의 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민주당 인사들은 당연한 귀결이라면서도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권위원 다운 수(手)다' '동교동식 해법이다'라는 반응도 들린다. 그러면서 민주당 주변에서는 동교동식 정치 문화가 새삼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


'의리 먼저, 대의 나중' 패거리 문화 형성

이에 앞선 12월10일 밤 권위원은 한화갑 최고위원·김옥두 사무총장 등 민주당 동교동계 의원 11명과 함께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 모였다. 권노갑 퇴진론으로 촉발된 동교동계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들은 포도주와 양주 7병을 마시고, 김대통령 노벨 평화상 시상식 장면을 지켜보며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 날 모임이 전해지면서 정작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이들의 화해 여부가 아니라, 동교동식 정치 문화였다. "제가 죄인입니다. 형님들을 잘못 모셨습니다"라는 설 훈 의원의 말은 그 중 압권이었다. 이 말 속에는 의리·충성·형제애 등 1차적인 가족 집단으로서 동교동계를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단어가 응축되어 있다.

동교동계는 상도동계와 더불어 한국 정치사의 양대 명문가로 꼽힌다. 두 집단 모두 주군에 대한 충성심과 위계 질서를 뼈대로 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집권 세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충성심과 위계 질서의 농도나 그에 따른 배타성은 동교동계가 훨씬 더하다는 평을 듣는다. 이는 하향 방임형으로 가신들을 풀어놓았던 YS의 스타일과 중앙 집중형으로 가신들을 분할 통치했던 DJ의 스타일 차이에서 말미암은 점이 크다. 나아가 동교동계는 우리 정치 사상 가장 많이 탄압받은 집단이었고, 그 과정에서 독특한 배타적 동류 의식이 강화되었다.


그런 점에서 '(핵심) 동교동계'와 '범동교동계'를 구별하는 것은 동교동계의 배타성을 이해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구별을 규정하는 단어는 '신뢰' '믿음' 등 정서적인 것들이다. 동교동계의 한 핵심 의원을 취재할 때 겪은 일이다. 정균환 총무가 화제로 떠올랐을 때 그는 갑자기 "그 사람이 어떻게 동교동계냐"라고 반발했다. 정총무는 1984년 민추협 운영위원으로 일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이 핵심 동교동계 의원보다 먼저 DJ와 인연을 맺었다. 그런데도 정총무는 DJ의 가신 그룹이 아니라는 이유로 범동교동계로 분류되고 있다. DJ 밑에서 십수년을 같이 지내면서도, 어떻게 관계를 맺었느냐에 따라 '핵심'과 '범'으로 분류되는 마당에, 뒤늦게 합류한 영입파나 개혁파가 동교동계와 가까워지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10일 모임에 참석했던 동교동계의 한 초선 의원은 "선민 의식으로 무장한 선배들의 배타성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라고 말했다.

이런 배타성은 이들을 논쟁이 불가능한 정치 집단으로 만들었다. 또한 의리를 대의보다 우선하는 패거리 문화가 형성된 것도 이런 1차적인 위계 질서 때문이었다. 동교동계 안에서 한화갑 위원을 곱지 않게 보는 이유 중의 하나는 '큰형'인 권노갑 위원에게 승복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권위원 퇴진론이 불거진 직후 권위원의 측근인 이훈평 의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교동은 상도동과 다르다고 했는데 인간 사회는 똑같더라. 배고플 때나 형제지 배부르면 남남이더라"면서 배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동교동계의 위계 질서는 일상적인 의정 활동에서도 자주 노출된다. 얼마 전 한 핵심 동교동계 재선 의원이 주도하는 연구단체 창립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동교동계 초선 의원이 한 중진을 회장으로 추천하는 역할을 맡기로 했는데, 축사가 길어지면서 순서가 뒤로 계속 밀렸다. 회장 추천만 하고 급한 약속 장소에 가려고 했던 이 초선 의원은 시간이 늦어지자 핵심 재선 의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냥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재선 의원이 그냥 있으라는 눈짓을 보냈고, 그는 자리에 앉은 채 연신 시계만 쳐다보았다. 그 초선 의원은 결국 다음 약속을 포기한 채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재선 의원보다 세살 더 많지만, 동교동계의 서열로는 밑이었다. 동교동계의 위계 질서가 얼마나 엄격한지를 보여준 예다. 동교동계의 또 다른 약점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이 정치력 부족이다.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은 "정치는 예술인데, 동교동계 인사들은 예술적 테크닉이 부족하다. 이는 DJ의 통치 스타일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한화갑 최고위원도 '한동안 잠행'할 듯

사진설명 '가족' 같은 '동지'들 : 동교동계의 형제 의식은 뿌리가 깉다. '권' 퇴진론에 반발해 항의하는 민주당 부위원장단(위)과 평민당 시잘 DJ의 경찰 출두를 호위하는 동교동 가실들(오른쪽).

당직을 맡고 있는 한 재선 의원도 "정치는 유연성이 생명인데, 동교동계 인사들은 너무 경직되어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흔히 DJ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이 원인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또 대야 관계에서는 정치력 부족으로 이어지곤 한다.

지난 7월 한나라당 권오을 의원의 '청와대 친북 세력' 발언이 나왔을 때,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권의원 제명을 주장하며 강경 분위기를 선도한 사람은 김옥두 총장이었다. 오히려 초·재선 의원들은 권의원의 사과를 받는 선에서 국회를 정상화하자고 주장했다. '강경 소장파와 현실적인 지도부'라는 정치권 관행이 역전된 셈이다. 김총장은 이때 DJ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거시적인 안목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다. 동교동계의 한 개혁파 의원은 동교동계가 대야 관계에서 정치력을 발휘하지도 못했고, DJ 개혁의 일선에 서지도 못한 채 소소한 이해 관계에만 얽매이는 정치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자성했다. 그리고 권퇴진론은 이런 동교동계의 내부 모순이 불러온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교동계 구파는 당내 개혁파 의원들이 제기한 권노갑 퇴진 요구를 파워 게임으로 바꾸었다. 권위원진영으로서는 살 길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는 거꾸로 동교동계 전체에 위기를 불러들였다. 권위원 퇴진 요구가 동교동계 전체의 2선 퇴진과 해체 요구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자승자박인 셈이다.

결국 김대통령은 민주당의 당직 개편 때 권노갑 최고위원을 포함한 동교동 핵심 인사들을 2선으로 후퇴시키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고, 이는 마침내 권위원의 결단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김옥두 총장을 비
롯한 동교동계 대부분의 당직 사퇴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선출직'인 한화갑 최고위원도 한동안 잠행이 불가피해졌다. 물론 한위원은 당내 개혁 세력의 후원자로 확실한 자리 매김을 했고, 앞으로 DJ의 부름을 받을 가능성도 남겨뒀다. 그렇다 해도 그가 '동교동계의 대표'로 처신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동교동계는 사실상 해체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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