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진 문화관광부장관, 음지 지양하고 양지 지향?
  • 안철흥 기자 (epigon@e-sisa.co.kr)
  • 승인 2001.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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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가신 출신 임명직 포기 약속' 두 번 어겨
대선을 코앞에 둔 1997년 9월11일. 서울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에서는 '비장한' 기자회견이 있었다.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의 비서 출신 의원들이 "김총재가 집권할 경우 우리는 청와대와 정부의 정무직을 포함한 어떠한 주요 임명직 자리에도 나서지 않겠다"라고 약속한 것. 회견장에는 한화갑 김옥두 남궁진 최재승 설 훈 윤철상 등 동교동계 ‘6형제'가 함께 섰다. 당시 옥중에 있던 큰형 권노갑씨도 서명으로 동참했다.




그러나 1999년 11월24일, 남궁진씨는 청와대 정무수석에 ‘임명'되면서 ‘약속'을 위반했다. 국가 현실이 약속을 어기도록 만들어 몹시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말과 함께. 당시는 동교동계가 나서 책임 정치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의원 직을 버리고 ‘일터'로 떠나는 그의 ‘희생'을 안쓰럽게 여기는 정서도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1년 10개월 뒤인 지난 9월19일. 남궁진씨는 약속을 두 번째 ‘위반'했다. 이번에는 ‘정부직'인 문화관광부장관에 ‘임명'된 것.


남궁장관은 김대통령이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인 1985년 동교동에 합류했다. 가신 중 합류 순서가 늦은 편. 그러나 꼼꼼하고 성실한 일처리 능력과 충성심으로 일찍부터 DJ의 신임을 받았다. 고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이며, 충남 논산 출신으로 ‘호남색'이 없다는 점도 그의 이미지를 동교동계 일반과 섞이지 않게 만들었다. 이런 이력은 가신인 그가 양지로 나설 수 있었던 배경으로 통한다.


1992년 대선 패배 직후 DJ가 정계를 은퇴하자, 그는 후임으로 전국구 의원 직을 이었다. 그의 의원 시절 평판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원만한 대인 관계를 바탕으로 해결사 역할을 여러 차례 맡았고, 뛰어난 정치 해설 능력으로 기자들 사이에서 ‘봉숭아 학당 훈장'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정무수석이 된 후의 평가는 엇갈린다. 동교동계 인사들은 ‘대통령의 의견을 충실히 받들었다' ‘사심 없이 정무수석 역할을 수행했다'라며 높게 평가한다. 반면 정치권에서는 너무 소극적이었다는 평이 주류다.


그는 일요일에도 출근할 만큼 헌신적이었지만, 철저하게 여권 내부를 조율하는 심부름꾼 역할로 스스로를 한정했다. 그가 만든 ‘비마론(肥馬論)'이나 ‘개혁 피로감' 같은 신조어들도 여권 내부를 겨냥한 말이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정무수석의 역할이 대야 관계를 푸는 일인데, 그가 있을 동안 대야 채널은 거의 작동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더구나 지난 3월 박지원 정책기획수석이 청와대에 컴백한 다음부터 그의 위상이 더욱 위축되었다는 진단도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문화관광부장관으로 나섰다. "문화산업은 순수 예술과 긴밀히 연결돼야 한다. 디지털과 연계해 문화 예술 발전에 최선을 다하겠다." 그의 첫 소감이다.


하지만 장관 자리 역시 그에게는 ‘영광'보다 ‘고난'이 많을 전망이다. 벌써부터 ‘배려 차원의 인사다' ‘경력 관리용 인사다' 하는 말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전문성보다 충성을 기준으로 삼는 DJ식 정실 인사의 대미를 장식했다고 꼬집기도 했다.


한 문화계 인사는 어설프게 아는 ‘나서기 형'보다는 ‘묵묵한 그림자형'이 낫다고 말했다. 이 말이 문화계 내부의 자조로 끝날지, 전화위복이 될지는 남궁장관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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