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웅은 왜 한나라당에서 튀는가
  • 김종민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1.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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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민정당 출신 '원죄'를 수구와 투쟁해 '속죄'
이슈 메이커. 16대 국회에서는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이 이 방면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한나라당에는 이회창 총재를 제외하면 뉴스 메이커가 별로 없다. 박근혜 부총재·김덕룡 의원·이부영 부총재 정도가 가끔 뉴스거리를 만들지만 그나마 요즘은 뜸해졌다. 김원웅 의원만큼 자주 그리고 지속적으로 화제를 제공해 온 정치인은 드물다.


최근에는 텔레비전 토론에 나가 미국의 중동 정책을 비판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의원총회에서는 보수 의원들이 들고 일어나 김의원을 성토했고 이총재까지 김의원을 몰아붙였다.


"절대로 독립운동은 하지 마라"




당시 의원총회장 분위기는 성토 일색이었지만 김의원은 낮은 톤으로 자기 주장을 폈다.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킨 이번 테러는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다고 보복 공격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안된다. 미국의 왜곡된 중동 정책이 변하지 않는 한 테러의 근본 원인을 제거할 수 없다." 김의원이 팔레스타인의 비극적 현대사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얘기를 이어가자 의원들은 '너만 잘났냐'며 야유하기도 했다. 김의원은 반테러 지원이 반이슬람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전투병 파병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의원의 성향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민족주의이다. 그는 얼마 전 아침 신문을 보다가 부시 대통령이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은 주둔한다"라고 말한 것을 보고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한국 국민과 정부와 상의해서 결정하겠다고 해야지 마치 미국이 원하면 다 된다는 투로 말한 것에 화가 치밀었다고 한다.


김의원은 민족 문제와 관련한 사안에는 비타협적이다. 그가 14·16대 국회에서 의정 활동을 하면서 제출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명하는 법안, 한·일 기본조약 원천 무효화 결의안, 주한미군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결의안 등은 그의 민족주의 성향을 잘 드러낸다.


김의원의 이러한 성향은 독립군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김의원의 양친은 모두 광복군 출신이고, 그는 어릴 적부터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중학교에 다니던 1950년대 후반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했다. 하루는 대전 그의 집에 양친과 함께 광복군 활동을 했던 '동지' 수십 명이 모여 대성 통곡을 하며 술을 마신 일이 있었다. 광복군 동지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에 '앞으로 우리 집안에서는 나라가 망해도 절대로 독립운동은 하지 마라. 그래야 자손이 번창한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중학생 김원웅은 그때 받은 충격 때문에 정치인이 되어 나라를 바로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김의원에게는 원죄가 있다. 그는 원죄를 속죄하기 위해 원칙에 충실하려고 한다. 그는 1971년 말 유신이 선포되기 직전 당시 집권당이던 공화당 공채에 합격해 당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90년 3당 합당 때까지 민정당 당직자로 일했다. 지금 김의원의 행보와 그가 군사 정권 시절 집권당 당료였다는 사실은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그의 변은 이렇다. 대학 시절인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참가해 투옥되기도 했지만 박정희 정권을 타도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윤보선·유진산보다는 박정희에게 비전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후 고민은 많이 했지만 월급쟁이로 한두 해 지내다 보니 20년 가까이 흘렀다는 것이다.


민정당 청년국장 시절, 이념 서적 규제 완화와 1987년 4·13 호헌 조치 반대 등 체제 내 개혁 노력을 하다가 제명되기도 했지만 원죄를 씻어낼 정도는 못된다. 대학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고 제정구 의원이 재야 운동을 하며 고생할 때 몰래 만나 밥도 사주고 용돈도 주었지만 만날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1990년 3당 합당 때 인생 행로를 바꾸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처지를 고민해 오던 그는 당시 민정당 대전 동구 지구당위원장이자 전국구 예비 순번이라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이번 기회에 고민을 털어 버리자'고 결심하고 3당 합당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14대 총선에서 당시 제1 야당이던 민주당 후보로 나와 당선되어 제정구·이 철·노무현 등 개혁 성향 정치인들과 호흡을 맞추며 면모를 일신했다. 16대 국회에서도 그는 여야 개혁파 의원 모임인 정치개혁모임을 주도하고 당내에서 개혁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는 등 활발히 활동해 왔다. 이러한 그의 행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줄기 희망'이라며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빨리 한나라당을 떠나라'며 비판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도 소신과 원칙 있는 정치인이라는 평과 함께 언론을 의식해 너무 튀는 것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받고 있다.


"당과 총재 변화 기대, 탈당 안한다"


지금 그는 점점 보수 노선을 강화해 가는 거대 정당 한나라당의 꼬리를 붙잡고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당 주류측에서는 '못참겠다. 징계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당내의 압박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그는 "나도 사람인데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문제는 나와의 싸움이다"라고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당 밖에서는 한나라당에서 나와 새로운 길을 가라고 주문하는 사람이 많다. 여야 개혁파 의원들이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력이다. 11월 말에는 강원룡 목사가 주관하는 평화포럼에서 여야 의원 20명이 모든 일정을 비운 채 하루 종일 머리를 맞대고 개혁 세력의 진로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나라당 내에서 점점 개혁파의 입지가 좁아져 가고 민주당 내부 사정이 크게 요동해 정치 지형이 흔들리면 그가 새로운 선택을 할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이 밀어내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 아직까지는 한나라당과 이회창 총재가 변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개혁 신당 창당이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다는 판단도 있다. 15대 총선에서 꼬마 민주당의 좌절 역시 큰 상처로 남아 있다. 그는 가시방석 같은 한나라당이 3김의 그늘 밑이나 정치적으로 의미 없는 무소속보다는 낫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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