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이 정학모를 내치지 못한 까닭
  • 안철흥 기자 (epigon@e-sisa.co.kr)
  • 승인 2001.10.2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외로운 처지'에서 정학모씨와 자주 만나…
화 내면서도 물리치지는 못해
한나라당의 실명 공개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이른바 '이용호 게이트'가 터진 이래, 한나라당은 '몸통'에 대한 의혹을 계속 부풀려 왔다. 그리고 'K·K·J'라는 머리 글자를 거명한 지 거의 한 달여 만인 10월19일, 한나라당 안경률·유성근 의원은 마지막 패를 꺼냈다. '주가 조작 사건으로 구속된 G&G그룹 회장 이용호씨를 비호한 여권 의혹의 몸통은 김홍일·권노갑·정학모 씨다.'




한나라당이 겨냥하고 있는 최종 타깃은 김홍일 의원이다. 장기적으로는 내년 대선을, 단기적으로는 10·25 재·보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적 효과를 거두기에 김의원만한 타격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전례로 볼 때 친인척 비리, 특히 대통령 아들의 비리는 정권에 치명상을 입히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머리 글자 폭로에서 실명 공개까지 한 달 정도 시간이 흘렀지만, 한나라당은 김의원의 비리 '사실'까지 적시하지는 못했다. 대신 한나라당의 공세는 김홍일-정학모-여운환, 이 세 사람의 관계에 맞추어져 있다. 김의원과 정씨가 막역한 사이이고, 정씨와 여운환씨도 절친한 사이인데, 정씨 소개로 김의원과 여씨가 여러 차례 만났다는 것이다. 이 증거로 제시된 것이 김의원의 8월 초 제주 여행과 광주 방문이다. 한나라당은 '이용호 게이트의 핵심 인물은 정학모'라는 이전의 주장을 한 걸음 더 진전시키는 성과는 거둔 셈이다.


정씨가 관련된 사실은 〈시사저널〉이 이미 3주 전에 밝힌 바 있다. '호남 주먹과 호남 검사의 검은 커넥션'(제623·624호) 기사에서 '지난 8월 초 김홍일 의원이 광주에서 열린 기아 타이거즈 출범식에 참석하러 내려갔다가 사업가 ㅈ씨와 광주시의회의 한 간부, 그리고 한국야구위원회 간부와 함께 여운환씨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한 것. 그 때 머리 글자로 쓴 ㅈ씨가 정학모씨다. 또한 2주 전에 게재한 '왜 김홍일인가'(제625호) 기사에서도 한나라당이 정학모씨를 중간 매개로 해서 김홍일-여운환-이용호 관련설을 폭로할 계획임을 보도한 바 있다.


정학모씨가 도대체 누구이고, 김홍일 의원과 어떤 관계이기에 이토록 의혹 사건의 초점 인물이 되었을까.


정씨는 김의원의 고향 선배이자 경희대 선배로,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그는 대학 시절 '주먹 세계'에 깊숙이 몸 담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에는 20년 이상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했고, 현재는 LG스포츠단 사장이다. 그는 진로건설 부사장을 지낸 관계로 건설업계에 인맥이 많고, 호남 출신 정·재계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1990년대 초반, 김의원의 몸 상태가 급속히 악화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정씨는 김의원의 물리 치료를 전담했다. 김의원은 취미인 수영도 정씨의 주선으로 시작했다.


정씨는 정권 교체 이후부터 김의원의 측근 인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권 초반 김의원 자택을 거의 날마다 드나드는 모습이 목격되었고, 정씨가 김의원의 민원 처리에 관여한다는 소문이 나돈 것도 그 무렵부터다.


"김의원은 동교동계 의원들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데다, 가깝게 지내던 연청 출신 측근들이 새 정부 들어 정부 투자기관 임원 등으로 떠나버려 외로운 처지였다. 정씨 등이 김의원의 새로운 측근으로 등장한 배경에는 이런 김의원의 처지가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김의원과 가까운 동교동계 인사의 말이다.


정씨에 대한 평은 극단으로 나뉜다. 동교동계 한 인사는 정씨가 김의원을 깍듯이 모시며 처세에 능란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정씨와 가까운 동교동계 의원은 "정씨는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사람들과도 거의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다"라고 말했다.


정씨를 둘러싼 뒷소문은 동교동계 내부에서는 오래된 비밀이다. 김의원과 가까운 동교동계 인사에 따르면, 정권 교체 후 김의원은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며칠씩 서울 교외로 피신하다시피 나가 있곤 했는데, 그런 '나들이' 때마다 정씨가 김의원 일행에 꼭 끼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동교동계 인사가 전하는 경험담이다. "한번은 서울시 외곽에서 이 멤버들이 쉬고 있는데 현직 고위 관료와 정부투자기관장(야당 출신으로 3당 합당 때 YS 쪽에 합류한 인물)이 찾아왔다. 알고 보니 정씨가 장소를 알려준 것이었다. 당시 김의원은 정씨에게 왜 이런 데까지 사람들을 끌어들이느냐고 화를 냈다. 그러나 두 사람을 물리치지는 않아, 그들은 저녁을 먹고 갔다."


"김의원 이름 팔고 다닌 측근은 있다"


이런 일들이 있자, 동교동계 몇몇 인사들은 김의원에게 정씨와 거리를 두라고 건의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김의원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동교동계 인사들은, 화를 내면서도 물리치지 못하고 의심이 가면서도 끊지 못하는 '김의원의 모질지 못한 성격'이 의혹설을 불러일으킨 한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정씨는 지난 국감에서 의혹 대상자로 떠오른 이후 기자들과 만나 '여운환·이용호를 전혀 모른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려 깊게 행동했고 의심 받을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이번에 실명을 공개한 이후 정씨는 '여운환은 옛날에 알던 후배'였다고 이전 주장을 번복했다.


"8월4일 제주에서는 호텔로 찾아왔기에 '사업하는 후배'라고 김의원에게 소개했다. 식사도 같이 했다. 8월7일 광주에서 야구 행사를 마치고 프라도호텔에서 20여 명이 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 자리에도 호텔 사장인 여운환이 있었다. 그것뿐이다."


실명 공개 후 정씨가 한 해명이다. 그러나 그의 해명에는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김홍일 의원 또한 실명 공개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제주도 여행' 건을 해명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의원은 "제주 공항에 여운환이 나와 인사했고, 정씨가 아끼는 후배라며 소개했다"라고 말했다. 정씨의 말과는 다르다.


김의원은 물론 정씨도 여운환·이용호 사건에 개입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한나라당이 제시한 증거물도, 비리 사실과는 관련 없는, 제주도 경찰청이 작성한 정보 보고 문건뿐이다.


김홍일 의원은 실명 공개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나는 부도덕하게, 과거의 정권 실세처럼 살아오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김의원과 가까운 여권 인사들은 이 말이 진심일 것이라고 말한다. '돈과 조직'에서 모두 벗어나 있던 여권 내 정치적 위상으로 볼 때, 김의원이 직접 비리에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의원이 주변 측근들을 방만하게 거느리고 있었으며, 김의원도 밝혔듯 '이름을 팔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여권이 전전긍긍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