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의 '권노갑 딜레마' 해법
  • 이숙이 기자 (sookyi@e-sisa.co.kr)
  • 승인 2001.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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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 때는 '애인' 본선 때는 '남남'/
조용한 지지 끌어낸 뒤 관계 재정립
12월6일 언론중재위원회에서는 민주당 이훈평 의원측과 〈한겨레〉 신문 사이에 한바탕 신경전이 벌어졌다. 〈한겨레〉가 11월10일 보도한 한 기사에 대해 이의원이 정정 보도를 요청했지만, 〈한겨레〉측이 '문제가 없다'며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이다. 결국 양쪽은 이견만 확인하고 헤어졌는데, 이의원은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태세다. 도대체 어떤 기사였기에 평소 언론에 관대하다고 알려진 이의원이 이렇게 세게 나오는 것일까?




'이훈평 의원은 지난 11월8일 권노갑 전 최고위원과 만나 "우리는 이제 이인제로 정했다. 누가 뭐라 해도 이인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이에 권 전 최고위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로 이 대목이다. 11월8일이면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 직에서 사퇴한 날이다. 이 기사를 쓴 기자에 따르면, 이날 권씨와 이의원은 이인제 고문 진영의 김 아무개·양 아무개 특보와 식사를 함께 했고, 그 자리에서 이런 얘기가 오갔다는 사실을 김특보로부터 전해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의원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펄쩍 뛰었다. 한 발짝 더 나아가 그는 "권고문이 왜 이인제쪽 사람들과 식사를 같이 했겠느냐"라며 만남 자체를 부인했다.


당시 이의원이 이인제 지지를 호소했고 권씨가 고개를 끄덕였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만남 자체를 부인하기에는 그 자리에서 오갔다는 얘기가 꽤 구체적으로 들린다. 이를테면 김특보가 일본에서 여는 권씨 출판 기념회에 동행해도 되느냐고 묻자 권씨가 승낙했다는 식이다.


그런데도 이훈평 의원이 이인제측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고 강하게 손사래를 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권씨가 이인제 고문과 가까운 사이로 비치는 것을 잔뜩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의원측은 "이번 기사에 대해 권고문이 끝(소송)까지 가라고 압박하고 있다"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권씨 역시 이 기사에 대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이훈평 의원이 법적 대응을 준비하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정가에서는 권씨가 이인제 지지자라는 소문이 기정 사실로 굳어져 있다. 지난해 최고위원 경선 때는 공개적으로 이고문을 지지했고, 그 이후 이훈평·박양수·조재환 등 권노갑계 의원들은 '이회창에 대적할 만한 사람은 이인제 밖에 없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하고 있다. 극도로 말을 아끼는 권씨가 '국민 지지도가 높은 사람이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말만큼은 아끼지 않는 것도 이고문에 대한 적극적 애정 표현으로 해석된다. 여기에는 한화갑 고문에게는 절대 대선 후보 자리를 내줄 수 없다는 동교동 구파의 '감정'도 작용하고 있다.


그런 권씨가 김대통령이 총재 직을 사퇴한 후 이고문과 거리 두기에 나선 데는 불공정 경선 시비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한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권씨는 측근들에게도 당분간 함구하라고 당부했다. 물론 측근들은 권씨의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권씨측의 거리 두기에 대해 이인제 고문측은 반색하는 분위기다. 사실 이고문 진영에서는 '권노갑 딜레마'로 속앓이를 해오던 터였다. 당내 경선에서 이기려면 권씨의 도움이 절실하지만, 국민에게는 권씨와 한 묶음으로 비치는 것이 결코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해서다.


"선대본부 뜨면 권씨 문제 자연스럽게 해결"


권노갑 딜레마를 풀기 위해 여러 차례 회의를 가진 이고문 진영에서는 얼마 전 작전을 세웠다. 예선까지는 지금처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후보가 된 후에는 관계 재정립을 시도한다는 이른 바 '예선·본선 2단계 전략'이다. 이고문의 한 참모는 "아무리 권 전 최고위원의 이미지가 안 좋아도 예선 득표 전략이나 의리상 당장 등을 돌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후보가 되고 선거대책본부가 짜이면 자연스레 동교동과 차별화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당 발전과 쇄신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특대위)의 쇄신안이 속속 공개되면서 이고문측이 권노갑 딜레마를 일찌감치 털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국민선거인단제' 같은 파격적인 제도가 도입될 경우 동교동계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감소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이고문은 권씨의 도움은 도움대로 받고 부담은 크게 가지지 않아도 되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김윤환 민국당 대표 같은 '봉건 영주'들의 활동 공간이 좁아진다는 것도 이고문에게는 유리한 대목이다. 이고문의 한 측근은 "전당대회 대의원 수를 늘릴 경우 가장 두려운 세력이 연청(김홍일 의원이 명예회장인 민주당의 최대 청년 조직)이었다. 하지만 성별·나이 등으로 제한하면 별 문제 아니다"라면서 특대위 덕분에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라고 좋아했다.


하지만 권씨가 조용히 도와주기만 바라는 이고문측의 바람이 그대로 실현될지는 의문이다. 권씨가 내년에는 지지 후보를 밝히겠다고 큰소리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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