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만델라’ 택한 DJ
  • 안철흥 기자 (epigon@e-sisa.co.kr)
  • 승인 2002.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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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정치 관심 끊고 ‘국제적·역사적 역할’ 찾아…“제2의 YS는 안될 것”
지난해 12월 중순께, 여권 핵심부가 여론조사를 했다. 바닥 여론을 확인할 때 사용하는 포커스 그룹 인터뷰(FGI) 방식으로 진행한 것이었다. 조사 결과, 국민은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 직을 사퇴한 것을 매우 만족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환 위기 극복이나 남북 문제 해결 등 DJ의 주요 정책에 대한 호응도 높았다. 한마디로 ‘정치에서 손 떼고 경제나 민생 문제에 전념해 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대신 각종 권력형 의혹 사건이나 인사 편중에 대해서는 지역과 계층을 불문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다음은 한 여권 관계자의 말이다. “여론조사 결과는 그대로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그로부터 사흘 후 각종 게이트를 성역 없이 수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김대통령은 또한 인사 탕평과 정치 불개입 등을 연이어 밝혔다. 국민 여론에 순응하는 DJ. 이는 전에 비해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라는 것이 주변의 지적이다.


김대통령이 이어 신년 화두로 삼은 문구는 ‘국운 융성’. 김대통령은 1월14일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임기 마지막 해의 국정 운영 목표를 공개한다. 또한 1월 중으로 ‘조각 수준의 개각’도 할 예정이다. 청와대 참모들의 말을 종합하면, 정치인 출신은 최대한 배제하고 전문성과 능력을 중심으로 한 ‘탕평 내각’이 될 듯하다. 한 관계자는 ‘집권 이후 거의 처음으로 DJ식 국정 운영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DJ는 현실 정치인의 길을 포기한 대신 역사에서 평가받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 같다.” 한 참모의 말이다.


특히 국내 정치에 대한 DJ의 관심 끊기는 단호하다. DJ가 총재직 사퇴를 결심하면서 취한 첫 조처가 권노갑 전 고문의 정치 2선 후퇴였다. 이어 박지원 전 정책기획수석의 사실상 은퇴와 김홍일 의원 외유 등이 발표되었다. 이들은 그동안 DJ의 복심(腹心)을 전달하는 메신저였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2선 퇴진이나 외유는 DJ와 당 사이의 가교가 끊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권 재창출 집착 않고 레임 덕에 초연

동교동계를 비롯한 민주당 인사들의 세배를 허용하지 않은 것도 김대통령의 결심 정도를 나타내는 사례다. 대신 김대통령은 3부 요인들과 함께 한 신년 인사회에서 대선 불개입 방침을 다시 한번 천명했다. 민주당 이 협 사무총장은 “당 현안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결심은 매우 확고하다. 총재직 사퇴 이후 공식으로는 물론이고 사적으로도 대통령의 의중을 전달받은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야당은 물론 여권 일각에서 김대통령의 진의를 의심하는 시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평생을 정치인으로 살았고, 또한 현실적으로 다음 대통령 선거가 자신에 대한 최종 평가 성격을 띠게 되는데, 여기에 초연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식이다. 그래서 정치권 주변에는 ‘DJ의 의중’을 담았다는 각종 설이 떠돌아다닌다. 얼마 전에는 김대통령이 민주당의 3월 전당대회를 선호한다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말이 이인제 민주당 고문 측근의 전언 형식으로 한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반대로 DJ가 7~8월 전당대회를 바란다는 설도 있다. 후보가 선출되면 DJ를 밟고 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너무 빨리 후보를 정하면 여권이 정부 정책에 딴죽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성공한 대통령으로 국정을 마무리하려는 DJ의 일정이 차질을 빚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DJ의 최측근 인사가 최근 이런 논리를 동교동계 인사들에게 설파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청와대 참모들은 이런 설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김대통령은 민주당 일에 관여할 마음이 없지만, 설혹 관여하려 해도 이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청와대 한 참모의 말이다. “과거에 대통령들은 임기 말이나 임기 후에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DJ 또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DJ는 국내에서 어떤 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버린 것 같다.” 레임 덕과 싸워 이기려고 하기보다 레임 덕에서 초연해지는 길을 택했다는 뜻도 된다.
오랫동안 김대통령을 취재했던 한 청와대 출입기자의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국내에서는 DJ를 쉽게 얘기하지만 외국에서의 평가는 완전히 다르다. 국제 관계 속에서 인맥을 들여다보면 DJ가 얼마나 돋보이는지 드러난다. DJ 또한 국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으려 할 것이다.” 제2의 만델라를 택하지, 제2의 YS가 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나아가 청와대나 민주당 인사들은 정계 개편이나 신당 창당에 나서지 않겠다는 김대통령의 말도 그대로 단순하게 받아들이라고 주문한다. 청와대 출입기자 ㄱ씨도 “예전 잣대로 현재의 DJ를 바라보면 아무 것도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참모들의 공통적인 말도, 국민의 선택을 받아 정권을 재창출하면 최선이지만 무리하게 만들지는 않겠다는 것이 DJ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역사에서 평가받겠다는 DJ의 이런 계획은, 당내 분란으로 시기가 조금 빨라졌을 뿐, 오래 전부터 세워놓았다는 것이 측근들의 주장이다. 다음은 민주당 이훈평 의원의 경험담. 그는 동교동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지난해 10월25일 보궐 선거 패배 직후 DJ의 총재직 사퇴를 언급했다. 그 직후 청와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이 준비 중인 카드를 먼저 발설해 김을 빼면 되느냐는 항의였다. 이의원은 그 때부터 김대통령이 총재직 사퇴를 준비하고 있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6월 이후 민주당 탈당 가능성


민주당 문희상 의원은 3김 연대 가능성을 거론하는 것은 난센스라면서, “DJ는 3김식 정치를 청산하는 일을 마지막 목표로 삼고 있었는데, 총재직 사퇴는 그 첫 단계로 기획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총재직 사퇴 이후 1인 보스 정치·지역주의·금권주의 등 3김 정치의 전형적인 모습들이 설 자리를 잃어 가는 형국이다. 대신 당내 민주화 등은 진전되고 있고, 민주당은 진통 속에서도 차츰 자생력을 길러가고 있다.


경남 창원에 있는 경남데이터연구소는 최근 민주당이 도입한 국민경선제에 대한 국민의 반응을 보기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런데 부산·경남 지역민 중 46.3%가 민주당의 국민 경선에 참여하겠다고 응답했다. 민주당 지지율이 11.5%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호응이다. DJ의 ‘살신성인’ 승부수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DJ의 임기 말 구상이 뜻대로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다. 많은 장애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갖가지 게이트가 난마처럼 얽혀 있고, ‘아들’을 비롯한 친인척들의 이름도 여기저기서 거론되고 있다. 한나라당도 여전히 반 DJ 공세를 멈출 기세가 아니다. 더구나 민주당 전당대회가 4월 말로 확정됨에 따라, 차기 후보의 ‘DJ 밟고 넘어가기’까지 견뎌야 할 모양새다. 따라서 탈당 카드가 나올 가능성도 점쳐진다. 청와대 관계자는 ‘(탈당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시한은 민주당의 차기 후보가 결정되고, 16대 국회의 후반기 원 구성이 마무리되는 6월 이후가 되리라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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