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땐 한몸, 경선 땐 산산조각
  • 안철흥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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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쇄신파, 대선 주자 진영으로 각자 흩어져…
후보 단일화 ‘아득’
쇄신을 실천하고 완성한다는 명분이 있고, 국민의 기대가 있는데도 출마를 주저하는 것은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민주당 신기남 의원이 한 연설 내용이다. 지난 1월16일, 제주도에서 가진 민주당 정동영 고문의 대권 도전 선언식에 찬조 연사로 참석한 자리에서다. 그는 정고문이 회원으로 있는 바른정치모임의 대표이자 민주당 쇄신파의 주도적 인물. 이 날 행사에는 신의원 외에도 천정배·정동채·추미애·정세균 의원 등 바른정치모임 회원들이 대거 배석했다. 당연히 쇄신파의 대주주인 바른정치모임이 ‘정동영 지지’로 돌아섰다는 관측이 뒤따랐다.





그러나 다음날 만난 신의원은 “개혁파 주자들이 하나로 뭉치는 데 지혜를 모으겠다”라면서, 자신은 정고문 지지파라기보다는 ‘단일화파’에 가깝다고 말했다. 바른정치모임이 조직적으로 한 사람을 지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제주 행사가 열리기 이틀 전인 1월14일. 바른정치모임 소속 의원 10여 명이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 모였다. 두어 시간 만에 문을 열고 나온 이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정동영 고문이 초선인 송영길 의원의 어깨를 다독이며 ‘미안하네’를 연발하는 모습도 보였다.
애초 그 모임은 정고문의 대권 도전을 추인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초선 의원 일부가 ‘왜 상의도 없이 결정하느냐’고 따지면서 모임 성격이 변했다. 이 날 임종석 의원은 김근태 캠프에 합류할 뜻을 비쳤고, 송영길 의원은 중립을 선언했다. 결국 모임은 ‘형제’들의 각개 약진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바른정치모임은 민주당 개혁 그룹 중에서 결속력이 높기로 유명하다. 지난해 정동영 고문이 쇄신의 물꼬를 트자, 이들은 ‘자동 개입’을 외치며 동참했다. 연초에는 함께 베트남을 여행했고, 지금껏 부부동반 단합 여행만 서너 차례 이상 다녀왔다. 그런 이들이 당내 대통령 후보 선출을 코앞에 두고 한목소리를 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들의 이런 모습은 민주당 쇄신파의 고민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쇄신파 한데 묶을 뚜렷한 ‘대안’ 없어



쇄신연대 소속인 이재정 의원은 “이번 경선은 쇄신파 대 범동교동계의 대결이고, 개혁 후보 대 이인제 후보 사이의 대결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노무현·김근태·한화갑에 이어 정동영까지 ‘개혁 주자’ 4명이 경쟁하는 현실에서 이의원의 이런 주장은 현실적인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누구를 밀어야 하나, 개혁파의 고민만 깊어갈 뿐이다.



더욱이 이인제 대세론이 갈수록 힘을 얻으면서 뚜렷한 대안마저 보이지 않는 상태다. 노무현 고문은 수개월째 지지율 답보 상태이고, 김근태·한화갑 고문도 지지율 한자릿수에서 맴돌고 있다. 정동영 고문이 가세했으나, 개혁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에 따라 각자 판단에 따라 대선 주자 캠프로 흩어지는 쇄신파 의원이 늘고 있다.



장영달·이재정·이창복·이미경·임종석 의원은 김근태 캠프에 합류할 예정. 이들은 지난 1월13일 조찬 모임을 갖고, 이같은 뜻을 확인했다. 신계륜·유재규 의원도 여기에 동참할 의사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문희상·조성준·설훈·정철기 의원은 한화갑 캠프에 들어가 있다. 원래 한화갑 계보였으니 친정에 복귀한 셈. 또한 정동채 의원을 필두로 바른정치모임의 다수 의원들은 정동영 고문과 함께 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박인상·정범구·장성민·송영길·김성호 의원 등 ‘새벽 21’ 소속 의원들은 이른바 중립파다. “개혁파 후보를 만드는 것보다 당원과 국민들에게 100% 자율권을 주는 것이 당 쇄신이라는 본래 뜻에 더 맞다.” 김성호 의원의 주장이다. 민주당의 정체성은 당의 강령을 지키는 데 있지 사람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누가 후보가 되든 상관없다는 말이다. 이들 중립파 5명은 1월18일부터 2박3일 일정으로 금강산을 방문하고 단합을 다졌다.



비록 뿔뿔이 흩어지고 있지만 이들 사이의 공통점은 아직 있다. 중립파와 이인제 캠프에 합류하는 문석호·정장선 의원 등 몇몇을 빼면, 쇄신파 의원 대부분이 개혁 후보 단일화를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임종석 의원은 2월 말까지 김근태 고문을 위해 최선을 다한 후, 그때 가서도 김고문 지지율이 오르지 않으면 개혁 주자 중 국민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는 주자에게 후보를 양보하자고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참여해서 최선을 다한 후에야 단일화하자고 설득해도 명분이 생기는 것 아닌가.” 임의원의 말이다.
쇄신연대의 한 관계자는, 정고문의 출정식에 참여한 쇄신파 의원들은 앞으로 노무현·김근태 고문이 출정식을 할 때도 그대로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종의 ‘공동 들러리’를 서면서 밑으로부터의 개혁 연대를 모색하겠다는 발상이다. 과연 개혁 후보 단일화는 가능할까.



한화갑 고문이 최근 당권 도전 쪽으로 선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이들의 기대치도 높아지는 양상이다. 그러나 노무현·김근태·정동영 고문은 여전히 ‘끝까지’를 외치고 있다. 또한 노고문을 제외한 나머지 주자들은 주자간 연대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주자들이 합의하는 단일화는 어렵다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따라서 고육지책으로 거론되는 것이 선호 투표제를 이용한 이른바 ‘하부 연대’이다. “꼭 단일화가 안되더라도 선호 투표제를 활용하면 개혁 후보에게 불리하지 않다”라는 신기남 의원의 말은 이런 정서를 대변한 주장이다. 쇄신파의 한 관계자도 “노무현이나 김근태를 1등으로 찍은 사람이 2등으로 이인제를 찍겠느냐”라면서 선호 투표제를 활용한 연대에 대해 낙관했다.



‘2등 표 몰아줄’ 후보 결정도 쉽지 않아



그러나 이런 희망 또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누구로 단일화할 것인가에 못지 않게, ‘2등 표를 몰아줄’ 후보를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임종석 의원은 “개혁파 지지자들 가운데서도 2등 표는 어차피 될 사람에게 몰아주자는 분위기가 있다”라면서 선호 투표제가 개혁파에게 유리하지 않을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실제로 최근 한 언론이 민주당 대의원을 대상으로 모의 선호 투표를 실시한 결과, 이인제 고문이 과반인 50.8%를 얻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쇄신파 내부의 또 다른 딜레마는, 당내 지지율 2위이자 대안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노무현 고문 주변에 현역 의원들이 꾀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공식·비공식으로 노고문 지지 의사를 밝힌 사람은 천정배 의원 정도. 쇄신파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이 모든 것이 쇄신의 과실을 따먹지 못한 노무현 고문의 책임’이라고 잘라 말했다. 지난해 쇄신 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쇄신파와 사이가 멀어졌고, 또 원외라는 약점 때문에 의원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어, 개혁파 의원들의 단일 대안으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이래저래 총론은 합의했지만, 구체적인 해법 찾기에서 벽에 부딪힌 민주당 쇄신파. 경선 날짜가 다가올수록 이들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안철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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