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와 박지원 등돌린 사연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2.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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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비디오’ 사건 때 틀어져…‘경선 음모론’으로 절정
최근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난 한 기자는 박실장이 왼손으로 악수를 청하는 바람에 어리둥절했다.
“내 오른팔은 노무현 후보 따라다니잖아!”


이인제 후보측이 “박지원 특보(당시 직함)가 오른팔 격인 유종필씨를 노후보의 대변인으로 앉혔다”라고 공격한 것을 빗댄 ‘박지원식 유머’이다.
박실장은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내내 ‘노풍’의 배후자로 지목되었다. 이후보 진영은 “박특보가 유종근 지사의 사퇴를 종용했다” “김심을 팔고 다닌다”라고 주장하면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박실장을 지목했다.




박실장 처음에는 ‘이인제 대세론’ 동조


이후보 진영은 경선에서 사퇴하는 순간에도 박실장을 걸고넘어졌다. 전용학 대변인은 “박실장이 기용된 것이 이후보가 사퇴를 결심하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라고 밝혔다. 이후보가 그동안 줄기차게 음모론의 배후라고 공격했던 박지원씨가 비서실장에 재기용되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경선을 끌고 가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얘기다.


당초 이후보와 박실장은 그리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권노갑 전 고문을 비롯한 동교동 구파가 이인제 대세론을 적극 옹호한 터라, 구파와 가까운 박실장도 이인제 쪽으로 기울었다는 평을 들었다.


그런 두 사람이 이렇듯 틀어진 계기는 무엇일까. 정가에서는 2001년 6월 초 ‘노무현 비디오’ 사건을 첫 번째 계기로 꼽는다. 2001년 3·26 개각 때 해양수산부장관에서 물러난 노후보(당시 상임고문)는 한동안 각종 당원 연수의 단골 강사였다. 그는 DJ 정권에 대한 비판이 하늘을 찌르던 그 즈음에 DJ 정권의 개혁을 옹호하고 수구 언론을 비판하는 내용을 설파하고 다녔다. 5월11일 청원연수원 강연은 특히 당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런데 며칠 후 청와대가 이 테이프를 전국 지구당에 배포하라고 당에 지시한 뒤로 노후보의 몸값이 더욱 치솟았다. 여권의 한 소식통은 “당시 김대통령이 이 테이프를 보았고, 그 이후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노후보에게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안다. 그 중간 역할을 당시 박지원 정책기획수석이 했는데, 이인제 후보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인제 후보의 측근인 이철용 전 의원은 언론사 세무 조사 국면에서 노후보가 적극적으로 DJ를 방어하고 나선 것이 DJ의 눈에 들었으리라고 주장했다. 노후보는 DJ의 말을 잘 듣는 반면, 이후보는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그의 해석이 얼마나 맞는지는 확인하기가 불가능하다. 다만 언론과의 전쟁 국면에서 이인제·노무현 두 사람이 상반된 입장을 보인 것은 분명하다. 이후보는 당시 ‘김대통령의 대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므로 전쟁터에 나가 부상하면 안 된다’는 독자론(獨子論)을 펴며 몸을 사린 반면, 노후보는 ‘아버지가 어려울 때 적극 나서서 돕는 아들이 진짜’라는 효자론(孝子論)을 펴며 언론과의 투쟁에 나섰다.


공교롭게도 이인제 진영이 박지원의 오른팔이라고 주장하는 유종필 특보는 바로 그 즈음 노후보 캠프에 합류했다. 유특보는 “2000년 총선 공천에서 탈락한 뒤 차기 대선에 어떻게 기여할까 하다가 노후보 성향이 가장 마음에 들어 돕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보측은 다 계획된 것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이인제, 김한길씨 만난 후 의심 더 깊어져


박실장에 대한 이후보측의 의심이 더 짙어진 것은 올해 초 김한길 전 문화관광부장관을 만나고 나서다. 이후보측은 1월 초에 김씨가 이후보를 찾아와 정계개편안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보가 이 안을 거부한 후 ‘왕따’ 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후보의 한 참모는 “김한길 전 장관과 박실장은 DJ의 핵심 참모이자 서로 한통속 아니냐. 박실장이 허주(김윤환 민국당 대표)와 같은 층에 사무실을 쓰면서 정계 개편을 논의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의심했다.


이런 이후보측 주장에 대해 박실장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일축한다. 유종근 후보는 이웃으로 이사왔다고 해서 가족들과 차 한 잔 마셨고, 유종필 특보는 청와대에서 같이 일했을 뿐 특별히 가깝거나 먼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박실장과 가까운 한 인사는 DJ의 대리인 격인 박실장이 확실하게 밀어주기를 바랐던 이후보측의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에 이후보가 박실장을 공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대통령은 박실장에게 중립을 지키라고 했고, 이런 뜻은 권노갑 전 고문에게도 전달되었다. 이 때문에 이후보가 박실장에게 강하게 불만을 표출해, 박실장이 매우 곤혹스러워했다”라는 것이다.


이후보가 경선에서 사퇴하는 이유로 ‘박지원’을 걸고 들어간 만큼 두 사람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다. 박실장은 욕 먹는 것마저도 DJ를 대신해야 할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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