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인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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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성격·후보 선출 싸고 2라운드 대결…결별이냐, 화해냐 ‘막다른 길’
지난 7월 말~8월 초, 민주당 설 훈 의원은 의원회관 3층 자기 방에서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이인제 의원의 방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이인제 대표-노무현 후보’ 카드를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이 제안은 ‘이인제 의원을 대표로 신당을 만든 뒤, 이의원이 이한동·정몽준·박근혜 의원을 영입해 노무현 후보와 이들 3인이 참여하는 경선을 관리하는 방안’으로 이어졌다. 이의원은 이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대표와 후보를 정해놓고 신당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제안의 속뜻이 노무현 살리기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일화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초점은 제안 내용이 아니라 제안받은 당사자인 이인제 의원이다. 설의원의 제안은 곧이어 한화갑 대표의 ‘백지신당론’으로 구체화했다. 현재 민주당으로는 대선 승리가 어렵기 때문에 환골탈태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그러나 좀더 따져보면 민주당이 분열해서는 안된다는, 다시 말해 이인제 의원을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심정이 녹아 있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정치고문인 김원기 의원이 노후보에게 신당 논의를 수락하도록 조언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재·보선 패배 이후 이인제 주가 급등


국민 경선에서 패한 이인제 의원이 신당 바람을 타고 다시 뉴스 메이커로 부활하고 있는 비밀은 뭘까. 거기에는 현실적으로 정치권을 지배하고 있는 지역 구도가 절묘하게 자리잡고 있다. 2000년 9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자민련 총재 간의 이른바 ‘DJP 연대’가 파기된 이후부터 지금껏 민주당은 수도권 선거에서 한번도 이긴 적이 없다. 지난해 10월25일 치러진 동대문 을과 구로 을 재·보선에서 참패했고, 지난 지방 선거 때는 수도권 광역단체장 82%를 한나라당에 내주었다. 8·8 재·보선 결과는 더욱 충격적이다. 서울에서 민주당과 한나라당 지지율 격차는 평균 26.2% 포인트에 달했다. ‘수도권 민심은 5대 5’라던 관행이 여지없이 깨졌다. ‘3홍 게이트’와 노무현 후보의 실책이 지지율을 하락시킨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충청권 민심이 돌아선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DJP 연대 때 6 대 4 정도로 민주당에 기울어 있던 충청 민심이 DJP 파기 이후 역전되었고, 이인제 후보가 경선에서 패한 다음부터 완전히 돌아서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의 말이다. 이런 분석은 이인제 의원이 당을 떠날 경우 민주당은 충청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데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충청권 소맹주’를 자처하고 있는 이인제 의원의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인제 의원 부활이 노무현 후보 하락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의 신당 논란은 상징적이다. 누구를 신당의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야 하느냐는 질문 속에 신당과 관련한 모든 쟁점이 들어 있다. 현재까지 한화갑 대표를 비롯한 개혁파 의원들과 중도파 의원 다수는 노후보가 다시 후보로 나서도 된다는 입장이다. 반면 이른바 ‘반노(反盧)’ 그룹은 노후보는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 ‘반노’ 그룹에는 경기와 충청 출신 일부 의원과 안동선·이윤수 의원 등 동교동계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반노’의 상징적인 대표가 이인제 의원이다.


이의원 스스로는 오래 전에 대권 도전 욕심을 비웠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노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만은 보지 못하겠다는 것이 이의원의 솔직한 심정이며, 따라서 대리인을 내세워서라도 후보 교체를 하고야 말겠다고 작정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이의원은 노후보에 대한 일체의 질문에 대해 ‘관심 없다’는 투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앙금이 최근 민주당의 ‘후보교체론-신당 파문’을 낳은 숨은 배경 중 하나라는 점을 민주당 주변에서는 부정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반노 정계 개편’을 위한 이의원의 행보는 경선 패배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5월2일 싱가포르에서 귀국한 그는 다음날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골프 회동을 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나라를 위해 자주 만나 의논하고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그는 지금껏 박근혜·김중권·이한동·박상천·정균환 등 당 안팎의 ‘비노(非盧)’ 혹은 ‘반노’ 인사들과 두루 만났다. 이의원은 또한 햇볕정책을 비난하고 김대통령을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규정하는 등 탈민주당 움직임도 보이기 시작했다. 민주당이 지방 선거에서 패한 이후 후보교체론을 사실상 주도한 것도 이인제계 의원들이었다. 6월20일 열린 중도개혁포럼 회의에서 박병석·송석찬·조재환·이근진 의원은 “노후보는 지방 선거 참패에 책임지고 사퇴하라”는 주장을 쏟아냈다.


7월30일 한화갑 대표가 백지신당론을 밝힌 뒤부터 이의원의 행보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집 지을 때는 먼저 다이너마이트로 평지를 만들지 않느냐며 민주당 해체론을 주장했다. 그는 또한 8월 초 측근들과 만난 자리에서 1997년에도 9월 초에 출마 선언을 한 뒤 11월4일에 국민신당을 창당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달 반이면 신당 창당과 후보 교체를 모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국민 경선에서 승리했을 때만 해도 신민주대연합 식의 정계 개편을 노렸던 노무현 후보는 이제는 정계 개편 ‘음모’를 방어해야 하는 처지로 바뀌었다. 지금도 노후보측은 민주당이 중심이 되어 개혁 세력을 영입하는 신당 창당을 선호하고 있다. 이를 위해 노후보측은 개혁 성향의 소장 학자와 영남권 시민운동가 들을 영입하려고 접촉에 나서기도 했다. 노후보가 ‘비노’나 ‘반노’ 그룹의 후보 선 사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 또한 신당 창당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이지만, 신당 논의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복선도 깔려 있다. “노후보는 대통령 후보로서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신당이 지지부진할 경우 선거대책위원회 체제로 당을 정비할 수밖에 없다.”

노후보측 한 참모의 말이다. 노후보측의 이같은 태도에는 노후보로도 충분히 대선 승부가 가능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또한 노후보측은 신당 논의가 구체화하더라도 정몽준 의원을 제외하고는 ‘+α’ 효과가 없는 데다가 정의원이 참여할 가능성도 적다는 데 판단의 기초를 두고 있다. “비주류가 단일 후보를 내세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노후보에 대한 정서도 모두 다르다. 따라서 그들이 얼마나 추진력을 가질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당 논의가 갈수록 지역연합론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데 노후보측의 고민이 있다. 노무현 후보는 지방 선거에 이어 이번 재·보선에서도 부산·경남의 표를 끌어오는 데 실패했다. 충청권에서 100만 표를 잃어도 영남에서 2백만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영남후보론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이런 위기감이 민주당에 확산되면서 다시 호남-충청-중부권 연합처럼 지역 연합을 통해야만이 정권 재창출이 가능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당내에 퍼지고 있는 것. 정균환·박상천·한광옥 최고위원이 제기했던, 민주당·자민련·민국당·한국미래연합·무소속이 ‘반창 연대’로 뭉쳐야 한다는 이른바 5자연대론도 지역 연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충청권 소맹주’인 이인제 의원의 주가가 상승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후보-대표 역할 분담 가능성 남아


경기도 출신인 이인제 의원의 한 측근 의원은 “충청권 민심이 돌아섰다는 것은 수도권 의원들에게는 평균 20%에 달하는 충청권 출신 지역 민심이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동요하지 않을 의원이 없을 것이다. 이들이 이인제 의원의 행보에 주의를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충청 민심 이반을 무기로 ‘반노’ 세력을 확산하겠다는 포석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이들은 나아가 유력 대선주자군 영입을 위해 노후보의 경쟁력을 아예 제한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안동선 의원 등 강경파가 신당 창당과 후보 경선 과정에서부터 노후보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이인제 의원측이 대의원 선거 한 번으로 후보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이런 식이다.


따라서 앞으로 진행될 신당 논의 과정은 노무현이냐 대안 후보냐, 정체성 유지냐 ‘흑묘백묘’냐를 둘러싼 친노 세력과 반노 세력의 전쟁터로 변할 공산이 크다. 그리고 한화갑 대표를 비롯한 중도파가 양측의 갈등을 봉합하려 시도하겠지만, 분당 가능성이 여전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노무현 후보와 이인제 의원의 악연은 뿌리가 깊다. 노후보가 지난해 대선 출마의 변을 밝히면서 그중 한 이유로 “이인제 의원이 후보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말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이런 두 사람의 감정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때가 지난 봄의 국민경선 때였다. 결국 경선에서 승패는 갈렸지만, 이의원은 끝내 노후보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노후보도 주위의 조언을 뿌리친 채 이의원과의 만남을 피해 왔다. 둘은 지금도 서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있다.


물론 두 사람의 화해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친노’인 추미애 의원은 8월10일 당무회의에서 “일부에서 DJP 공조를 아쉬워하지만 당 안에 지역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먼저 통합해야 한다”라며 노무현·이인제 두 사람의 화해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인제 의원의 측근인 원유철 의원도 최근 노후보를 만난 자리에서 두 사람의 화해를 역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후보-이인제 대표’ 신당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시각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화해하기에는 서로 감정의 골이 너무 깊다’(민주당 관계자)는 의견이 아직은 지배적이다. 노후보는 국민 경선 당시 “이고문이 민주당 후보가 되면 그를 위해 뛰기가 막막하다”라고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다. 현재 이인제 의원의 마음도 비슷하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두 사람의 질긴 악연이 결국 대선을 4개월 앞둔 상황에서 민주당을 공중 분해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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