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이 죽어야 정권이 산다?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2.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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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정파 불문하고 일만 터지면 돌팔매…‘대통령급 실장’이 자충수 둬 문제
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은 DJ 정권의 ‘동네북’이다. 여권 내부에서건 야당에서건 걸핏하면 ‘박지원’ 이름 석자가 공격 목표로 떠오른다. 인사 발표가 나면 대번 ‘박지원 작품’이라는 소리가 나오고, 게이트가 터졌다 하면 박지원이 개입되었다는 소문이 뒤따랐다. 박실장은 민주당 정풍 파동 때도 쇄신 대상이었고, ‘노풍’이 불 때도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지목되었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민주당 이해찬 의원의 병풍 유도 발언이 문제가 되자 한나라당은 곧바로 박실장을 정조준했다. 서청원 대표는 8월22일 “우리는 이 모든 정치 공작의 배후에 박실장이 깊숙이 개입해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다음날 청와대 앞 시위에서는 박실장을 해임해야 한다는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 요구서’를 채택했다.



이처럼 한나라당이 박실장을 공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박실장이 국정을 쥐락펴락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경필 대변인은 “대통령이 요즘 무슨 정신이 있겠는가. 결국 박실장이 다 하지”라는 말로 한나라당 지도부의 인식을 드러냈다. 남대변인은 개인적인 평도 곁들였다. 박실장이 문화관광부장관 때 상임위에서 몇 번 부딪쳤는데,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박실장이 국정 운영의 배후 조종자로 의심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조순용 정무, 박선숙 공보수석 등 대통령 주변에 포진한 사람들이 대부분 ‘박지원 사람’으로 불리는 인사들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박실장에 대한 견제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점도 박실장에게 화살이 집중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대통령은 사인만 하고 실제 국정 운영 방향은 박실장 선에서 결정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박실장 스스로 빌미를 제공한 측면도 적지 않다. 박실장은 정책특보에 기용되면서부터 ‘정치 뚝, 경제 온리(only)’를 강조했다. 하지만 지인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종종 속내를 드러낸다는 후문이다. 최근 한 사석에서도 그는 ‘누구를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 김대통령에 대한 퇴임 후 평가가 왜곡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권 재창출은 필요하다’는 논리를 설파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나라당 서청원 대표가 “박실장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회창 후보를 낙마시켜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말을 했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총리 고르기 어려운데 내가 해버릴까?”



박실장은 또 장 상 총리임명동의안이 부결된 후 “(새 총리로) ○○○는 어떨까?” “차라리 △△△를 올릴까” 하는 말을 자주 했다. 한 술자리에서는 “(고르기가 쉽지 않은데) 차라리 내가 해버릴까?”라고 농담도 했다. 총리 인선이 마치 자기 손에 달려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발언이다.



이런저런 연유로 한나라당은 장대환 총리서리도 박실장 작품이라고 본다. 정치 장악력이 취약한 총리를 내세워 비서실장의 영향력을 높이고, 50대 총리로 대선 정국에서 세대교체 바람을 일으키려는 속셈으로 ‘장대환 카드’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특히 50대 총리가 ‘정몽준 띄우기’를 위한 고도의 대선 전략이라고 본다. 청와대가 바람 빠진 노풍의 대안으로 ‘정몽준’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으며, 이를 위해 세대교체론을 확산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시작되었다는 의심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장대환 서리가 지명된 후 정치권과 언론계에는 박실장과 장서리의 ‘부적절한 관계’를 지적하는 얘기가 적지 않게 나돌았다. 박실장이 문화관광부장관 시절 유난히 장대환 <매일경제> 사장과 가까워 다른 언론사 사장들의 눈총을 샀다거나, 언론사 세무 조사 때 <매일경제>의 탈루 세금 액수가 공개되지 않았고 검찰 고발 대상에서 빠진 것도 박실장과의 친분 관계 때문이라는 식이다. 이에 앞서 장총리서리가 DJ 정권 초기 비상경제대책위원회와 제2건국위원회 등 관변 단체에 참여한 것도 언론사 사장으로서는 이례적이라는 평이 나온다.



박지원 때리기 증후군 자리잡아



그런가 하면 박실장은 지난해 언론사 사세와 관련해 ‘조·중·매·동’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조·중·동’ 사이에 <매일경제>를 끼워넣은 것은 현정권에 비판적인 동아를 폄하하는 의미도 있지만, 그만큼 <매일경제>에 대한 박실장의 호의가 남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나라당이 총리 인사청문회에 박실장을 증인으로 세우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소통령·중통령에 이어 대통령급 실장이라는 얘기까지 듣고 있는 박실장이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대로 정말 대통령 노릇을 대신하고 있는지는 규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박지원’이름 석자는 DJ 정권이 끝날 때까지 정치 중심에서 회자될 전망이다. 한나라당이 틈만 나면 물고늘어질 태세인 데다, 총리서리 인선에 대한 책임론까지 부각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미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어떻게 이렇게 흠집 많은 인물을 총리 후보로 내세웠느냐’며 청와대의 검증 시스템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높다. 장총리서리 지명을 발표하면서 박실장은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검증을 완료했다”라고 장담했었다.



이와 관련해 한 언론인은 박실장이 믿는 구석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두 번씩이나 총리 임명동의안을 부결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에 검증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실장은 장 상 총리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후 “한나라당도 몹시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웬만하면 통과시켜 줄 테니 최대한 빨리 새 총리 임명동의안을 내라고 하더라”는 얘기를 주변에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정국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면서 평소 여유만만하던 박실장 주변도 상당히 긴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다. 정치 논평을 자제하던 박선숙 대변인은 “서청원 대표가 번번이 청와대를 들먹이는데, 말로만 증거를 이야기하지 말고, ‘증거’라는 것을 내놓으라”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박실장은 장대환 총리서리 임명동의안을 어떻게든 통과시키려고 발벗고 나섰다. 민주당 한화갑 대표가 장총리서리 임명동의안 처리를 ‘자유 투표’가 아닌 ‘당론’으로 정하기로 한 것도 박실장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박실장이 한대표에게 총리 임명동의안 가결을 당론으로 정해 달라고 요청했고, 한대표가 이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박실장 본인도 직접 움직였다. 그는 8월23일 한·중 수교 10주년 기념식장에서 만난 이회창·노무현 후보에게 이례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여와 야, 민주당 쇄신파와 동교동계, 친 노무현과 반 노무현 등 여야 불문, 정파 불문하고 일만 생겼다 하면 박지원 실장부터 욕하고 보는 현상은 이제 DJ 정권의 새로운 정치 증후군으로 자리잡았다. 이에 대해 박실장의 한 측근은 “그만큼 박실장이 한쪽에 치우침이 없었다는 반증 아니냐”라는 독특한 논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요즘 정가에는 박실장이 하도 욕을 먹어 오래 살 것이라는 ‘덕담’이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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