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밉지? 나 잘라! 어서 잘라”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2.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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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일부 전국구 의원, 제명 요구…금배지 지키며 당 떠나려는 ‘꼼수’



"나를 잘라 주시오.” 10월23일 한화갑 대표를 찾아간 민주당 최명헌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 공동대표는 자신을 제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후단협 소속 전국구 의원인 김기재·박상희·장태완·최영희 의원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최의원이 ‘잘리기’를 자청한 것은, 그래야 의원 직을 유지한 채 민주당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현행 선거법에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소속 정당의 합당·해산·제명 외의 사유로 당적을 이탈·변경하거나 2개 이상 당적을 가진 때에는 의원 직을 상실한다’(192조)고 되어 있다.


이 조항은 1994년 통합선거법에 포함되었다. 이전에는 전국구 의원 중에도 이 당 저 당 옮겨 다니는 철새가 많았는데, 1992년 ‘조윤형 파동’을 계기로 전국구 의원은 이적할 때 의원직을 박탈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당시 조의원은 국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지 석달 만에 민주당으로 옮겼다. 이에 대해 국민당 전국구 예비 순번 1번이던 탤런트 강부자씨는 조의원의 의원 직은 무효라며 헌법 소원을 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조의원이 의원 직을 유지하는 것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이후 정치권에서 논란을 벌인 끝에 전국구 의원의 이적을 제한하는 쪽으로 선거법을 개정한 것이다.


그 결과 전국구 철새는 대폭 줄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갖가지 편법이 등장했다. 1995년 DJ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박쥐 의원’ 논란이 대표적이다. 당시 DJ는 자신을 지지하는 의원들을 이끌고 민주당을 떠났다. 그런데 김옥두·남궁진·배기선 등 전국구 의원 10여 명은 발목이 묶였다. 이들도 처음에는 자기들을 제명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기택 총재가 거절하자 7개월이 넘게 호적은 민주당에 두고 의정 활동은 국민회의에서 하는 이중 생활을 계속했다. 이듬해 4월로 예정된 15대 총선을 치르려면 의원 직을 유지하는 것이 유리했고, DJ계가 집단 탈당할 경우 KT(이기택 총재)계가 전국구를 승계해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김기재·최영희 “제명 위임한 적 없다”


DJ계의 버티기는 두 달짜리 의원을 양산하는 또 다른 파행을 낳았다. 총선 직전 DJ계 전국구 의원들이 집단 탈당하면서 민주당 예비 순번들이 대거 의원 직을 승계한 것이다. 이들은 의원 선서도 못하고 물론 의정 활동 또한 시작도 못했지만, 두 달 세비에 ‘헌정회 회원’이라는 명예까지 챙겼다.
최명헌 의원이 제명을 요청한 것도 7년 전 상황과 비슷하다. 그는 한대표가 ‘웃음’으로 거부할 뜻을 밝히자, “다른 곳에 가서 일하면 결국 제명하지 않겠느냐”라며 거듭 강경한 의사를 비쳤다. 3년 전 한나라당이 당론과 달리 행동한 이미경·이수인 의원을 제명해 자유를 준 것처럼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 안팎의 여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안 그래도 ‘철새 정치인’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은 판에, 당 지지도 덕분에 얻은 의원 직까지 지키려고 안달하는 모습이 반감을 사고 있는 것이다. 한 정치학자는 “소신이 뚜렷하면 왜 백의종군을 못하느냐. 1995년 민자당 전국구 의원들이 자민련으로 옮기면서 당당하게 금배지를 떼고 간 것을 기억하라”고 꼬집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후단협 내부에서도 이견이 나온다. 김기재 의원은 “(제명을) 위임한 적도 없고 당을 떠날 마음도 없다”라고 했고, 최영희 의원도 “나는 생각이 다르다”라고 말했다. 정몽준 후보 지지율이 주춤하고 민주당 내부가 급속도로 노후보 중심으로 뭉치는 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래저래 ‘당선되기보다 탈당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 전국구’라는 말이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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