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가는 이회창 뒤통수가 가렵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3.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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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복귀설 소문 떨치려 외유 결심 DJ식 행보 따르는 것 아니냐는 의심 못 떨쳐



"표안 나게 살짝 나갔다 오려고 했는데….”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12박13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1월15일 인천공항 귀빈실에 나타난 이회창 한나라당 전 대선 후보는 말이 없었다. 침묵을 견디다 못한 양정규 의원이 “너무 조용한데 이상배 정책위의장이 정책 보고라도 하지”라며 웃음을 유도했으나, 이씨는 오히려 “이제 그만 들어가시라”며 더 어색해 했다. ‘창사랑’ 회원 100여 명이 ‘이회창!’을 연호했을 때 얼굴이 펴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회창씨 일본 방문을 수행한 김찬진 변호사는 ‘피정’이라는 말로 그의 일본행을 설명했다. 천주교 신자들이 일상 생활에서 떠나 기도에 전념하며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며 쉬는 시간을 갖기 위해 일본에 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정치권 인사들을 만나지 않고 주로 하루 일정으로 관광을 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단, 1월16일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출국한 권철현 의원이 이씨와 합류했다는 것이 한 측근의 전언이다. 일본 국립 쓰쿠바 대학 대학원에서 도시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은 권의원은 이씨의 비서실장을 지낸 최측근 인사이다.



대선에서 패했지만 이씨는 그동안 제대로 쉬지 못했다. 대선 이후 두 번 옥인동 자택을 찾아갔던 한 측근은 갈 때마다 사람들이 북적댔다고 말했다. 선거 때 대변인을 맡았던 조윤선씨는 “자문교수단·보좌진 등 그룹 별로 돌아가며 식사를 하는 일정만도 빡빡했다”라고 전한다. 이씨가 12월31일부터 1월3일까지 대구·경북 지역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한 의원은 이씨가 “차라리 집에 있을 걸 괜히 내려왔다”라고 고충을 토로했다고 전했다. 그곳까지 사람들이 몰리는 통에 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변호사 사무실 개설’ 없던 일로



이씨는 일본에서 돌아온 뒤 잠깐 국내에 머무르다가 2월 초순 미국으로 가기로 했다. 측근인 유승민 여의도연구소장이 준비 작업을 했다. 유소장은 설 직후 미국에 가 6개월 정도 머무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사무실을 내고 사회 활동을 할 것이라던 얘기는 백지화했다. 김찬진 변호사는 모양 내기보다는 실질적인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유소장은 구체적인 장소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으나, 주변에서는 버클리 대학을 거론하는 사람이 많다.



이씨가 판사 시절인 1970년에 버클리 대학에서 해외 연수를 했던 인연이 있고, 동부보다 서부 지역이 기후가 온화해 지내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한때 스탠퍼드 대학도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가 머무르기로 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고 한다.
이씨가 미국에 머무르는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가 해외행을 결심한 이유부터가 국내 정치 상황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씨가 김대중 대통령 모델을 따라가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1992년 대선에서 패한 DJ가 영국으로 떠났다가 정계에 다시 복귀한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측근들은 이런 얘기가 있다는 말만 해도 펄쩍 뛴다. 유소장은 정계에 복귀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이흥주 전 특보도 “이씨 자신이 누구보다 정계를 떠나겠다는 결심이 확고하다”라고 강조했다.



애초에 외국행에 부정적이던 이씨가 미국행을 결심한 것은 이처럼 꺼지지 않는 ‘정계복귀설’ 때문이다. 실제 당 주변에서는 대선 이후 이씨를 만난 일부 의원과 지지자들이 그에게 당고문 등을 맡아 당을 추스르는 ‘어른’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했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1월15일 인천공항에 환송나온 ‘창사랑’ 회원들은 ‘이회창! 사랑해! 돌아와!’라고 외쳤다. 3월로 예정되어 있는 전당대회 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일부 중진 의원들이 ‘창심(昌心)’을 업으려 한다는 소문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김변호사는 “국내에 있으면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런저런 말이 나오게 되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과거 이씨를 보좌했던 당 후보 비서실에서는 아예 2004년 총선 이전에는 절대 들어오면 안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1년 이상 외유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각제 개헌 성사 여부도 거취에 영향 줄 듯



그러나 수도권의 한 소장파 한나라당 의원은 당의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이씨 복귀를 추진하는 운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보수파와 개혁파 간에 당 개혁을 둘러싼 시각차가 너무 커서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당이 표류할 가능성이 있고, 이렇게 되면 ‘이회창’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생겨나리라는 것이다. 그는 과거 ‘이회창 후원회’와 팬클럽인 ‘창사랑’ 그리고 이씨가 돌아와야 유리하다고 보는 정치권 세력이 이런 흐름을 주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일각에서는 실현 가능성과 관계없이 내각제 개헌론과 이씨의 정계 복귀를 연관해 보기도 한다. 2월 국회 때 내각제 개헌론을 발의하겠다는 박승국 의원(대구 북 갑) 등 대구·경북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 있는 내각제 개헌이 현실화한다면 이씨가 정계에 복귀할 공간이 훨씬 넓어진다는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가 어떤 정치를 펼치는가 하는 것도 이씨의 앞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노당선자가 실정을 한다면 상대적으로 이씨의 활동 공간은 더 넓어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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