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조용한 말년을”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3.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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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퇴임 후 순수 학술 연구에 매진…4천억 대북지원설이 발목 잡을 수도
1998년 2월25일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에서는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같은 시각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는 리어커 한 대가 청와대를 향하고 있었다. 경남 밀양에서 온 김삼수씨(45)가 끄는 리어커에는 ‘이완용보다 죄질이 나쁜 김영삼 부자를 사형장으로 보내고, 김영삼 일가의 재산을 국고로 환원하자’고 쓴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이 날 YS는 대통령이라는 버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대통령 자리에서 완전히 떠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더구나 YS 처벌을 요구하는 한총련 학생들이 ‘상도동 진격대’를 만드는 바람에 YS는 신변 안전마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YS의 걱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새로운 비리가 폭로되지 않을까, 언제 청문회 출두 요구서가 날아들까 가슴 졸여야 했다. 당시 YS를 청문회에 세워야 한다는 의견은 70%에 달했다.



세계 유명 대학·인권단체 50여 곳에서 초청



제16대 대통령 취임식을 앞둔 지금. 청와대 분위기는 5년 전과 사뭇 다르다. 최근에는 DJ의 대북역할론이나 경제특사론을 거론하는 사람이 늘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DJ 재평가 기류에 DJ와 청와대는 조금은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의 발언으로 4천억원 대북지원설이 쟁점화하자 청와대는 다시 긴장하는 기색이다. 과연 DJ는 퇴임 이후 어떤 길을 걷게 될까.



“DJ의 달력에 2월26일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취임식 날 노당선자에게 바통을 터치하는 그때까지는 대통령 직에만 몰두할 뿐이다.” 김한정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퇴임 후 정해진 일정은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세계 유수의 대학 및 미국·유럽의 인권단체와 연구기관의 초청 건수는 50여 개에 달하지만 외국 방문 일정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당초 DJ는 퇴임 후 아태재단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 문제를 연구하고 세계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을 위해 활발히 활동할 계획이었다. 아태재단측은 카터와 고르바초프를 벤치마킹해 DJ를 세계의 지도자로 보필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아태재단이 잇단 구설에 휘말리는 바람에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더구나 아태재단이 ‘김대중 도서관’으로 바뀌어 DJ의 행동 반경은 상당 부분 축소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동국대 황태연 교수는 “DJ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세계의 민주주의와 북한 핵 문제에 일정 역할을 해야 한다. 더불어 경제를 부흥시킨 대통령으로서 세일즈 외교에까지 그 영역을 넓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퇴임 후 DJ는 당분간 대외 활동을 하지 않고 건강을 추스를 생각이다. 김한정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순수한 사회 활동도 정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어 김대통령은 공식 활동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적어도 올 한 해에는 언론에 나와 평가를 받거나 이슈를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DJ는 정치권과 담을 높이 쌓았다. 동교동계 해체를 지시하고 아태재단을 연세대에 기증한 것도 국내 정치와 연결 사슬을 끊는 방편이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DJ는 정치적으로 오해받을 행동이나 당선자에게 누가 될 언사를 삼가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대통령 취임식에 오는 귀빈들과의 만남도 최소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지원, 동교동에서 계속 보좌



북한 핵 위기가 고조되자 DJ의 역할을 기대하는 여론이 일고 있다. 하지만 DJ는 전직 대통령이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노무현 당선자가 햇볕정책을 계승함으로써 DJ의 할 일은 끝났으니 이제 노당선자 시대라는 것이다. 고려대 함성득 교수는 “여론이 극단으로 갈려 있는 상황에서 DJ가 나서는 것은 새 대통령에게 부담만 될 뿐이다. 한국 정치사의 산 증인으로서 진솔한 회고록을 작성하는 것이 더 뜻깊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DJ는 당장은 회고록 집필도 시작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대통령 회고록이 업적 나열 등 자기 과시에 치우친 예가 있고, 국내 정세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앞으로 1∼2년 동안은 기억을 되살려 메모나 자료를 정리할 것이라고 측근은 전했다.



다만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의 역할에는 충실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국익을 위해 행동하는 퇴임 대통령의 전례를 만드는 것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김대통령은 주로 세계 평화와 관련한 순수 학술 활동에 매진하는 쪽으로 자신의 역할을 찾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지원 비서실장은 퇴임 후에도 DJ를 곁에서 보좌한다. 박실장은 동교동 사저 부근에 사무실을 내 앞으로도 DJ의 충실한 말벗이 되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다. 또 부속실·외교안보수석실·공보실 담당 직원 몇 명이 DJ 주변에 남을 것으로 예상된다. 자원 봉사를 해서라도 DJ를 모시겠다는 사람이 많아 DJ의 말년은 외롭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동교동에 들어가 DJ 부부를 모실 예정이었던 장남 김홍일 의원은 최근 동교동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40여 년을 정치권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DJ는 이제 정치권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떠나려 한다. 그러나 그의 퇴장이 순탄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특히 4천억원 대북지원설은 퇴임 후에도 DJ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는 “청와대와 집권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 DJ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한나라당에서는 “4천억원 대북 지원은 청와대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DJ와 박지원 그리고 북한의 핫라인이 가동된 것이 분명하다”라며 고삐를 죄고 있다.



최근 감사원은 4천억원 가운데 1천7백억원의 행방만을 확인했다. 진상을 규명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로써 검찰 수사가 불가피해졌다. 만약 이 돈이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 직전 돈 세탁을 거쳐 북으로 건너갔다면 DJ에게는 두고두고 멍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한나라당이 제기한 의혹 가운데 국가정보원 도청 의혹·공적자금 비리 의혹·조풍언 게이트 등이 청와대와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어 DJ에게 불똥이 튈 가능성도 없지 않다.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도 힘들지만 대통령 자리에서 떠나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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