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있는 곳에 정치 있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3.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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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대구 방문 시점 미묘…“무심한 행보 자체가 정치 행위”



지난 3월5일 갑작스레 인천공항에 도착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맞은 사람은 대선 때 그를 수행했던 이채관씨 혼자였다. 현역 의원은 물론 측근들도 없었다. 이종구·양휘부·이병기·이흥주 씨 등 측근들은 김포공항에서 합류했다. 이씨는 곧바로 대구로 내려가 강재섭·백승홍·손희정 의원의 안내로 지하철 참사 현장을 둘러보고 나서 유족들을 위문한 뒤 오후 5시쯤 서울로 돌아왔다.



그가 인천공항에 도착해 대구에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오기까지는 여섯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귀국이 몰고온 파장은 길었다.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만큼 이씨의 이 날 행보는 뜻밖으로 받아들여졌다. 정가에는 그가 정계에 복귀하는 순서를 밟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무성하게 번졌다.



대구에 대한 ‘부채 의식’에 시달려



이씨측은 이런 얘기만 나오면 완강히 도리질을 한다. ‘다시 정치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유승민 전 여의도연구소장)는 것이다. 이씨의 법률 자문에 응하는 서정우 변호사는 기자들이 하도 의심하는 통에 기자기피증에 걸렸다며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이씨의 말을 제발 믿어달라”고 하소연했다. 이씨 또한 기자들에게 전당대회 날짜가 며칠로 잡혔냐고 되묻는 등 현실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씨 주변에서는 그가 급거 귀국한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우선 미국 비자를 장기 체류용 교환연수 비자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9·11 테러 여파로 반드시 본인이 현지에서 바꾸도록 올 1월에 관련 규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또 모친인 김사순 여사의 건강이 좋지 않고, 대구 참사 유족들을 위문해야 한다는 건의가 이어졌다는 것도 이유로 든다.
일단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비자의 종류를 바꿀 때는 반드시 본인이 와야 한다. 또 김사순 여사가 위독할 정도로 건강이 나쁜 상태는 아니지만 93세로 고령이다. 이씨는 3월5일 대구에서 올라오자마자 명륜동을 찾아 모친에게 인사했다. 측근들은 이씨에게 대선 때 최고의 지지를 보낸 대구에서 큰 사고가 났으니 한번 방문할 필요가 있다는 건의를 여러 차례 보냈다.



문제는 귀국 시기이다. 3월3일까지만 해도 측근들은 귀국한다 해도 전당대회가 끝난 뒤에나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씨는 왜 이틀 뒤에 갑자기 귀국한 것일까. 측근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이씨는 대구 참사가 발생한 뒤부터 몸은 미국에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대구에 대한 일종의 ‘부채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승민씨는 “본인이 대구에 가보고 싶어했다”라고 전했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오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이씨가 자기가 마음을 비웠는데 너무 이것저것 따지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니냐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러던 차에 3월20일로 예정되어 있던 전당대회가 4월 중순으로 연기될 조짐을 보이자 서둘러 귀국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도 있다. 3월1일 미국으로 출국한 하순봉 의원이 이씨를 만나 대구를 방문해야 한다고 권유한 것이 이씨가 귀국을 결심한 직접 이유라는 소문이다. 이에 대해 하의원의 측근은 그가 미국 동부에 있는 처가를 방문했다며 이씨를 만나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하의원과 친한 정창화 의원은 그가 로스앤젤레스에 갔다고 말했다. 정의원의 말대로라면 로스앤젤레스는 이씨가 머무르던 스탠퍼드 대학과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어서 두 사람이 만났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씨의 귀국은 전당대회를 앞둔 한나라당에 ‘창심(昌心)’ 논란을 불렀다. 이씨가 친밀한 관계인 서청원 대표를 막후에서 지원하려고 귀국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인 것이다. 양정규 의원 등이 ‘함덕회’라는 친목 모임을 만든 것(위 상자 기사 참조)이나, 이씨의 측근인 이흥주씨가 마포의 한 오피스텔에 개인 사무실을 낸 것과 맞물려 논란은 증폭되었다.
그러나 이씨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논란은 사그라지는 분위기이다. 최근 서울 옥인동 집으로 이씨를 찾아갔던 한 중진 의원은 그가 자신의 귀국이 당에 어떤 영향이라도 주지 않을까 무척 걱정하더라고 전했다. 이씨는 귀국 이후 신경식·김영일 의원과 유승민씨를 만났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씨가 어찌 보면 정치에 초연한 듯이 행보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전당대회를 앞둔 미묘한 시기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대구를 방문한 부적절한 행보, 남다른 관계였던 서대표의 출마 움직임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 등은 고도의 정치 행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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