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전’ 공세, 한나라당 발등 찍나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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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안된’ 폭로로 거센 역풍…주화론·지도부책임론 대두
‘간첩사건 연루자들 열린당 출마’. 이철우 의원 사건의 진원지인 주간지 <미래한국>의 기사이다. 그런데 최근 기사가 아니다. 총선을 앞둔 지난 4월3일자 보도이다. <미래한국>은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선 허인회·이인영·우상호·함운경 씨 등이 김동식 간첩 사건(1995년)에 연루되었고, 한명숙 의원의 남편은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는 이철우 의원도 나온다. ‘이씨는 지난 92년 10월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4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기사는 선거운동 내내 이철우 의원 지역구(연천군·포천군)에 뿌려졌다.

8개월이 지난 12월8일 <미래한국>은 이철우 의원 노동당 입당이 확인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를 근거로 주성영 의원은 ‘간첩 암약’ 발언을 했다. 주의원은 지난 11월부터 전대협·반미청년회(1988년)·구국학생연맹(1986년) 사건 관련자 등에 대해 공소장과 각 심급별 판결문을 대법원과 법무부에 요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철우 의원 전력 공방은 일견 준비된 폭로로 비쳤다. 정형근 의원도 가세하면서 사상전은 확전 태세이다. “조선노동당 사건에 연루된 열린우리당 의원이 더 있다.”

폭로 첫날 한나라당은 우왕좌왕했다. 한 당직자는 “주성영 의원 발언을 보면서 ‘어어’ 했다. 후속타를 준비하고 터뜨린 것인 줄 알았는데, 준비된 실탄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철우 의원이 자신의 고등법원 판결문을 공개하며 역공을 펴자 한나라당은 바빠졌다. 폭로 다음날인 12월9일이 되어서야 주성영·박승환·김성조 의원 등 한나라당 법사위 의원들 연명으로 대법원에 판결문을 요구했다.

“박근혜, 보수몰이 덫에 걸렸다”

주성영 의원은 지난 국정감사 때부터 사상전을 준비했다. 한나라당에서는 국정감사에 맞추어 전대협 출신 의원들의 사상을 조사해보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주성영 의원실의 권태윤 보좌관은 “1980년대 학생운동 사건에 관한 자료를 지난 10월 국정감사 도중 법무부에 요청했다. 자료가 오지 않아서 11월에 다시 요구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법무부는 두 번에 걸친 공문을 통해 개인 신상 보호를 이유로 자료 제출 불가를 통보했다. 자료를 광범위하게 요청했지만, 실제로 넘겨받은 것은 전대협 5기(김종식)와 6기(태재준) 판결문뿐이었다.
의욕은 앞섰지만 준비는 엉성했다. 주성영 의원이 요청한 자료 목록에 나오는 반제청년동맹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주의원측이 원래 요청하려던 단체는 1989년 안기부가 자주·민주·통일 그룹, 조국통일그룹, 관악자주파와 함께 전대협 배후로 지목한 반제청년동맹이다. 엉뚱하게도 주성영 의원측은 1998년 반제청년동맹을 요청했다. 두 단체는 이름만 같지, 사건 자체가 다르다.

준비 없이 촉발된 사상전을 치르면서 한나라당 내에서는 자연스럽게 주화론과 함께 지도부에 대한 책임론도 제기되고 있다. 비주류인 홍준표 의원은 “박근혜 대표가 영남권 의원들 덫에 걸렸다”라고 말했다. 김용갑·이방호 의원이 박근혜 대표를 앞다투어 압박하는 ‘용호상박’ 보수몰이에 이어 영남권 초선까지 가세해 당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는 주장이다.

원희룡 의원은 “이철우 의원 사건은 사실이 밝혀져야겠지만, 지도부도 역사 의식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당 지도부의 전략 부재를 질타하는 목소리도 제기되었다. 한 당직자는 “지도부가 전략이 있다면 정형근 의원을 내세우면 안된다. 정의원이 주전론을 펴면 오히려 여권에 말린다”라고 말했다. 고문 사건 재조명을 들고 나온 열린우리당 전략을 겨냥한 말이다.

그런데 지도부보다 더 심하게 치명타를 입은 곳은 ‘수요모임’이다. 비교적 제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소장파 의원들 모임인 수요모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주성영 의원과 함께 사상전에 뛰어든 박승환·김기현 의원이 수요모임 소속이기 때문이다. 수요모임 소속 한 의원은 “할말이 없게 되었다”라고 말을 아꼈다. 수요모임은 조기 휴전을 바랄 뿐이다. 12월13일 의원총회에서도 박계동 의원은 “이철우 의원은 현대사의 한 아픔이다. 껴안고 가자”라며 주화론을 폈다. 평소 박의원은 여권 386의원들에 대한 사상 검증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왔다.

이렇게 주화론이 퍼지고 있지만 사상전은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이 고문 사건에 대한 재조명 카드를 꺼내면서, 한나라당이 꺼낼 카드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12월13일 의원총회에서 주화론이 제기되었지만, 한나라당은 진실을 끝까지 가려야 한다고 결론 냈다. 한나라당으로서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 만큼 제2의 이철우 의원을 찾아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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