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 주주가 불쌍한 이유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9.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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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집 키우기에 열 올려 ‘기업가치 하락쭭주가 추락’… 우유부 단한 정부도 ‘한몫’
지난 5월20일 오후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다. 지난해 8월부터 추진한 현대전자와 LG반도체 간의 빅딜을 마무리하는 주식 양수도 계약식이 LG측 거부로 무산된 것이다.

행사 예정 시간은 오후 5시30분. 김영환 현대전자 사장을 비롯한 현대측 임원들은 일찌감치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LG그룹 구조조정본부 강유식 사장 일행은 약속보다 15분 늦은 5시45분께 행사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해 참석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행사장에서 기다리는 기자들을 보자 강사장 일행이 발길을 돌려버린 것이다. “김사장 어디 있어요? 이런 식으로는 안합니다. 무슨 자랑거리라고 이렇게 합니까?” 강사장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뒤늦게 상황이 잘못되고 있다고 깨달은 기자들이 뒤따라 나서자, 강사장 일행은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취재진과 현대측 사람들은 닭 쫓던 개가 되고 말았다.

이 장면을 지켜본 금융계 한 인사는 “청와대를 향해 시위하는 것 같다”라고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빅딜을 압박하는 바람에 반도체 사업을 빼앗긴 데 대한 분풀이가 아니겠느냐고 해석한 것이다.
펀드매니저 “LG전자 주식 모두 팔았다”

반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외국 증권사의 서울 지점장은 “LG그룹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순전히 경제 측면에서 보았을 경우, 반도체 빅딜로 인해 득을 보는 쪽은 현대가 아니라 LG이다. 이것은 최근 두 회사의 주가 동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반도체 빅딜이 타결된 뒤 현대전자와 LG반도체 주가는 연일 연중 최저치를 갱신해 가면서 곤두박질치고 있다. 현대측이 아무리 ‘합병 상승 효과’가 있다고 강조해도, 투자자들은 합병된 회사의 장래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스란히 현대가 떠안아야 할 부담이다. “그런데도 LG가 빼앗겼다는 인식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재벌의 구조 조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외국 증권사 지점장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사실 증권가에서는 LG그룹에 대한 기대감이 적지 않았다. 소리 없이 구조 조정을 진행하고, 여기서 생긴 잉여금을 구조 조정에 재투입하면, LG그룹 계열사들이 완전히 새로운 회사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LG전자이다. 이 회사는 LG반도체 주식의 41.2%를 보유하고 있고, LG LCD 지분의 99.8%를 가지고 있다. 반도체 매각 대금이 2조5천6백억원이고, LCD 매각 대금이 16억 달러이다. 둘을 합치면 4조5천억원이나 되는데, 이 중 3조5천억원이 LG전자 몫이다.

지난해 말 이 회사의 부채 비율은 375%. 9천억원 정도를 투입하면 부채 비율을 200% 아래로 끌어내릴 수 있고, 나머지 금액을 신기술 개발 등에 투입할 경우 기업 가치는 몰라보게 좋아질 것이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2만1천원 안팎인 이 회사 주가가 3만∼4만 원까지 오르리라고 예상한 것도 그같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같은 전망은 상당 부분 퇴색하고 말았다. LG가 반도체 매각 대금의 상당 부분을 데이콤과 대한생명을 인수하는 데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LG 강유식 사장은 “유입될 자금의 절반 정도를 재무 구조 개선에 쓰겠다”라고 밝혔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한 투신사의 펀드매니저는 “LG그룹이 데이콤과 대한생명 인수에 열심인 것을 보고 LG전자 주식을 한 주도 남기지 않고 모두 팔아치웠다”라고 털어놓았다.

이같은 반응에 대해 LG전자의 한 관계자는 “지나치다”라고 서운해 했다. 매각 대금의 일부만 쏟아부어도 기업의 재무 구조가 엄청나게 좋아지는데,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가 이를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의 돈이 LG전자를 위해 쓰일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룹 차원에서 하는 일이라서 알 수가 없다.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LG는 이미 데이콤을 인수한 것이나 다름없다. 동양그룹과의 막바지 협상을 마치면, 오랫동안 꿈꾸던 목표를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LG가 정부와의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거둔 성과이다. 96년 정부는 LG텔레콤을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로 지정하면서, LG그룹이 데이콤 지분을 5% 이상 보유하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당시 정장호 LG텔레콤 사장은 이석채 정보통신부장관에게 불려가 서약서까지 썼다. 그런데도 LG는 우호적 지분을 확보하는 방식을 통해 지분을 30% 이상 확보했다. 그리고 나서 정부에 지분 제한 해제를 요청했다.

여기에 정부가 화답했다. 반도체 빅딜로 인해 LG가 피해를 보았다고 보고, 보상 차원에서 지분 제한을 풀어 준 것이다. 그 결과 정부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은연중에 ‘빅딜에 협력한 기업=피해자’라는 등식을 만들어 냈고, 계열사 수를 늘리겠다는 재벌의 요구에 순순히 응한 꼴이 되었다. 정부가 세운 기준을 스스로 허문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LG가 처음부터 정부 말을 고분고분 들었다면 데이콤을 인수할 수 있었겠느냐. 이런 상황에서 어떤 재벌이 정부 말을 따르겠느냐?” 국내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정말로 웃기는 것은 LG가 아니라 정부라고 꼬집었다.

데이콤 인수보다 더 심각한 것은 대한생명 인수 건이다. 데이콤은 LG정보통신과의 상승 효과라도 기대할 수 있지만, 생보사는 인수 대금을 지불해야 할 LG전자·LG정보통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이 회사 주주들은 보이지 않게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현재 LG가 구상하는 대한생명 인수 방안은 다음과 같다. 대한생명을 인수하고, 사실상 LG의 특수 관계사로 알려진 한성생명을 인수해 LG생명(가칭)으로 간판을 바꾸어 단다. 그리고 매물로 나와 있는 동아·국민·두원·태평양·조선 생명 가운데 하나를 합병해 대형 생보사를 만드는 것이다. LG그룹 관계자는 LG생명의 역할에 대해 “삼성생명이 삼성그룹에서 하는 역할과 비슷하지 않겠느냐”라고 귀띔했다.

이런 마당에 최근에는 LG증권과 LG종금의 합병 문제가 증권업계의 화제로 떠올랐다. LG종금을 LG증권에 합병하겠다고 하자, LG증권 주가가 날마다 하한가를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LG증권 주식을 대량 보유한 한 투신사 관계자는 “피해 배상을 청구하는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라며 분개했고, LG증권의 한 관계자는 “투자자들의 항의가 너무나 거세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난감해 했다.

“재벌의 확장 전략, 제2의 IMF 위기 부를 것”

이 밖에도 LG는 민영화를 앞둔 한국가스공사에도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도 그룹의 주력 사업인 유화와 석유 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하면 그만이겠지만, 이것이 과연 구조 조정의 본래 취지에 맞는 것인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LG를 비롯한 재벌의 몸집 부풀리기 경쟁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지난해 기업의 합병·매수(M&A)로 특수를 누린 외국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한국의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5대 재벌 가운데 하나는 지금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롭다. 이것이 잘못되는 날에는 외국인 투자 자금이 일시에 빠져 나가고, 환율과 금리가 다시 요동칠 것이다. 미국이 금리를 인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고, 엔과 위안마저 불안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한국 재벌들은 다시 확장 전략을 펼치고 있다. 경기가 살아날 조짐을 보이자, 구조 조정을 미루고 몸집 부풀리기 경쟁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한국이 위기를 맞은 것 아니냐. 그런데도 똑같은 실책을 되풀이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한국인은 참 잘도 잊는다.” 벽안의 증권 전문가는 혀를 끌끌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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