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은 빚으로 살찌는 ‘불가사리’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1997.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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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부채 많을수록 덩지는 ‘공룡’…재무 구조 엉망, 부채 비율 20,000% 그룹도
한보그룹 사태는 문민 정부 실세들을 하루아침에 ‘失勢’로 추락시켰다. 이 사건이 정·관계가 로비로 얼룩진 권력형 비리임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한보 ‘협력자’들을 단죄해 정경 유착의 고리를 끊는 일 못지 않게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재벌들의 고질적인 차입 위주 경영 행태이다. 한보 사건은 차입 위주 경영이 너무 지나쳐 파산으로 이어진 좋은 본보기이다.

한보철강은 부채 비율이 96년 무려 1,892%에 달했다. 93년 말(348%)에 비해 5배 이상 늘어났다. 자본금이 9백억원인 회사가 무려 5조원(96년 말 기준)이나 빚을 끌어다 쓴 것이다. 이 빚 규모는 채권단이 은행 대출금과 회사채, 제2 금융권 차입금을 합해 산출한 공식 집계일 뿐이다. 여기에 계열사 및 위장 계열사를 통하거나 융통 어음을 발행해 변칙 조달한 빚이 1조∼2조원 더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출금 순위와 재벌 순위 거의 같아

게다가 이 천문학적 규모의 빚은 대부분 94년 이후 조달되었다. 한보는 94년부터 96년까지 은행권에서만 해마다 1조원 가량을 빌렸다. 92년 3천4백억원, 94년 1조5천억원이던 이 회사의 빚은 96년 말 3조5천억원으로 엄청나게 늘었다. 제일은행은 총여신의 4.5%, 자기 자본의 60%나 되는 돈(1조1천억원)을 한 기업에 몰아 주었을 뿐더러, 95년 이후에만 8천억원 가까이 대주었다.

한보철강에 물린 금융기관은 무려 백 개에 육박한다. 한보는 모든 금융기관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한보철강이 95년부터 아예 이익이 나지 않은 ‘요주의 회사’였고 96년 초부터 증권시장에서 부도설 혹은 자금악화설이 끊임없이 나돈 상황을 금융기관들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최근까지 자금 지원이 계속된 것은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 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금융기관 스스로 물린 측면도 적지 않다. 이미 수조원이 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빚이 많을수록 채무자인 기업이 채권자인 금융기관에 큰소리 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고, 이것은 한보 사태에서 명징하게 드러났다. 또 ‘설마 한보가 망하겠느냐’는 식으로 덩지가 클수록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도 작용했을 것이다.

덩지가 클수록, 빚이 많을수록 도리어 안전한 재벌로 치부되는 것은 다른 재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자금 조달이 지극히 비정상적이었던 한보와 다른 재벌을 맞비교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르지만, 빚이 많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재벌들의 경우 대부분 빚을 얻어 공장을 짓고, 빚을 내 계열사를 늘리며, 꾼 돈을 갚기 위해 또 돈을 꾸는 차입 경영이 관행이 되다시피 한 것이다.

30대 재벌 그룹은 금융기관에서 95년 말 현재 88조원을 끌어다 썼다. 총대출금(3백91조원)의 21.5%를 30대 재벌 그룹 소속 6백여 회사가 끌어간 것이다. 거의 재벌이 소유한 제2 금융권의 경우 재벌들의 독식 현상이 은행보다 심하다. 30대 재벌은 은행 돈의 13.9%(35조3천억원)를 차입했지만, 제2 금융권 돈은 38.4%(53조원)나 쓰고 있다. 30대 재벌 재무 구조, 중소기업보다 부실

96년 들어서도 재벌 독식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96년 6월 말 현재 30대 재벌이 가져간 은행 대출금은 39조6천억원(점유율 14.2%)이나 된다. 95년 말에 비해 4조3천억원이 늘어난 것이다.96년 6월 말 현재 은행에서 1조원 이상을 꾼 재벌은 모두 11개인데, 삼성그룹이 5조4천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이 현대(5조1천억원), LG(4조4천억원), 대우(4조원) 순으로 대출금 순위가 재벌 순위와 같아 흥미롭다. 큰 재벌일수록 빚이 많은 것이다. 한보는 96년 빚에 쪼들리던 유원건설을 인수하면서 대출금 순위가 95년 말 8위에서 6위로 두 단계 뛰었다.

빚이 많으니 재벌들의 재무 구조가 좋을 리 없다. 30대 재벌 가운데 재무 구조를 나타내는 대표적 지표들인 자기 자본 비율(총자산 대비 자기 자본 비중)과 부채 비율이 표준 비율(각각 50%, 100%)을 만족시킨 재벌은 하나도 없다. 95년 말 현재 30대 재벌의 자기 자본 비율은 가장 재무 구조가 우량하다는 롯데(35.9%) 동국제강(34.5%) 삼성(32.7%) 그룹도 30%대이다. 이 세 그룹의 부채 비율(금융업 제외)은 200% 안팎이다. 10대 재벌 가운데 현대·LG·대우·선경·쌍용 그룹 등은 자기 자본 비율이 20%대, 부채 비율이 300%대로 괜찮은 축에 속했지만, 한진·기아·한화 그룹은 그렇지 못했다. 각각 10%대와 400~600%대로 매우 불량했다. 심지어 뉴코아(9.8%)·한일(9.7%)·진로(3.8%)·한라(3.3%)·삼미(2.9%) 그룹은 자기 자본 비율이 10%대도 되지 않았다. 부채 비율도 삼미와 한라는 3,000%가 넘었고, 진로는 무려 20,000%에 육박했다. 한보는 이때까지만 해도 자기 자본 비율이 11.8%, 부채 비율이 752%였지만, 96년에 새로 쓴 빚이 많아 현재는 삼미그룹 수준으로 추락했다. 삼미와 한보 그룹의 주력 기업이 포항제철에 자산을 인도하거나(삼미특수강) 위탁 경영(한보철강)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은, 재무 구조가 극히 취약한 재벌의 행로를 웅변해 준다.

한국은행 기업 경영 분석에 따르면, 95년 말 현재 한국 기업들의 자기 자본 비율은 평균 25.9%였다. 대기업(상시 종업원 3백인 이상)은 이 비율이 27.1%로 중소기업(20.8%)보다 높았다. 이것은 대기업의 경우 주식 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내로라 하는 대기업들이 몰려 있는 30대 재벌들의 자기 자본 비율이 20.5%로 중소기업보다 낮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상당히 많은 재벌 계열사가 중소기업보다도 재무 구조가 부실하다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조흥은행의 한 관계자는 “금융기관 처지에서 믿고 돈을 줄 곳은 재벌 계열사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절대로 대출이 될 수 없는 부실 기업도 재벌 계열사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자금 지원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30대 재벌 그룹 소속 계열사 가운데 상당수가 그룹이라는 울타리를 걷어내면 당장 망할 회사가 많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적지 않다. 이것은 굳이 하위 재벌에서 예를 들 필요가 없다. 간판 재벌인 삼성그룹의 경우도 이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95년 이 그룹의 순이익은 무려 2조9천6백억원으로 맞수인 현대그룹(1조1천6백억원)을 일찌감치 따돌렸다. 그런데 2조9천6백억원 가운데 84.7%인 2조5천억원이 반도체 호황 때 삼성전자가 벌어들인 순익이었다. 55개 계열사를 거느린 이 그룹은 반도체 외에 조선·석유화학·무역 관련 회사를 빼면 수익이 미미하거나 전혀 없는 회사도 상당히 많다.

금융기관들이 재벌 계열사를 우선 믿는 것은 다른 계열사의 빚보증이 붙기 때문이다. 빚보증과 상호 출자는 재벌들이 적은 돈으로 그룹을 이루고 덩지를 키워온 비법이다. 이것보다 더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재벌을 믿고 대출하게 하는 것은 ‘재벌은 망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정부가) 망하게 하지 않는다’는 동아줄 같은 믿음이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 금융기관들도 이런 잘못된 믿음에 쉽게 ‘오염’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국 기업에게는 온갖 심사 기법을 동원해 갚을 능력이 있느냐를 따지지만, 한국 재벌에게는 이 촘촘한 그물망을 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라는 파산율 0%의 강력한 후원자가 뒤에 버티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벌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경련을 통해 금리를 내려야 국제 경쟁력이 살아난다고 주장해 왔다. 선진국은 물론 경쟁국에 비해 살인적으로 높은 금리 부담을 안고서는 해볼 재간이 없다는 호소였다. 이들이 동원하는 수치들은 거의 날조된 것이 없다. 제조업의 금융 비용 부담률은 6%에 가까워 일본의 1.8%, 대만의 2.3%, 독일의 1%에 비해 매우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재벌들은 항상 자신들이 지나치게 돈을 많이 끌어 써 스스로 금리를 높였다는 점을 은폐해 왔다. 금융 비용은 돈을 꾸어 쓴 대가인데, 이 수준을 결정하는 요인은 자금 조달 비용(금리)과 조달 규모(차입금 의존도)이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93년 이후 금리가 안정되어 금리 요인이 금융 비용 부담을 낮추는 데 기여한 것으로 분석되었지만, 차입 규모는 그렇지 못했다. 차입금 의존도가 45% 수준에서 별 변동이 없었던 것이다. 재벌이 그토록 원하는 금리 인하는 그들이 금융기관에서 돈을 덜 빌려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따라서 높은 금융 비용 부담이 기업의 이익을 줄이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업자득일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의 매출액 대비 영업 이익률은 95년 평균 7.1% 수준이나 된다. 5% 수준인 일본·미국·대만 등에 견주어 높다. 그러나 매출액 대비 경상 이익률은 평균 2.7%로 비교 대상국의 3.6%에 비해 뚝 떨어진다. 금융 비용 부담이 많아 나타나는 현상이다.

재벌들이 차입 위주로 경영을 하게 된 것은 그동안 돈을 꾸면 꿀수록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금융연구원이 81~95년 실질적 차입 비용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89·92·93년을 제외하고는 마이너스로 나타났다(3개년 간도 각각 금리 부담이 0.4% 1.2% 1.4%로 없다시피 했다). 차입 비용이 들기는커녕 차입이 도리어 이익을 가져온 것이다. 이런 기막힌 결과는, 물가가 높아 금리가 그 이상 뛰어야 하는데도 금리 수준을 정부가 통제한 데서 말미암았다.

기업들은 재무 구조가 아무리 나빠도 금융 시장에서 통제되지 않는다. 은행의 기업 고객 평가가 엄정하게 이루어지지도 않고 있지만, 자기 자본 비율이 이 평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현행 평가표에는 동일 업종 내에서 재무 구조가 상당히 좋은 경우와 극히 불량한 경우에도 총점에서 1점 남짓 차이가 날 뿐이어서 이것이 여신 금리 결정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차입금 이자는 세제상 비용으로 처리(손금 산입)되는 혜택을 받고 있다. 이것은 증권시장에서 자기 신용으로 돈을 조달하는 유상 증자 같은 바람직한 방법을 억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제도가 재벌들의 차입 위주 경영을 부추기는 셈이다.

금융연구원 박경서 자금시장팀장은, 재벌들로 하여금 재무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느끼도록 제도적인 유인 장치를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팀장은 그 대안으로 현행 공정거래법의 ‘소유 분산 및 재무 구조 우량 기업집단(또는 기업체) 제도’를 ‘재무구조 우량 기업집단’으로 단순화하자고 제안했다. 현행 제도는 내부 지분율과 자기 자본 비율을 동시에 만족시키도록 되어 있어 재벌들이 이 요건을 충족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규제의 실효성이 적다는 것이다. 또 자기 자본 비율로 단순화할 경우에도 공정거래위의 걱정과 달리 소유 분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은 빚으로 건설된 재벌 공화국

남의 돈을 많이 끌어다 쓸수록 정태수 총회장처럼‘고위험 고수익 투자’ 전략을 택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것은 투자가 아니라 도박이다. 더욱이 실패해도 자기가 잃을 것이 별로 없는 도박이 다. 부실화의 피해를 관련 금융기관과 이들에게 돈을 맡긴 많은 국민이 입게 되는 불공정 게임이 벌어지는 것이다. 반면 자기 돈이 총 투자 금액의 50%만 되어도 절대 이같은 위험한 전략은 쓸 수 없다는 것이 기업들의 말이다. 투자가 잘못되었을 때 당장 자기 돈이 날아가기 때문이다.

부채 비율이 높은 기업을 방치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우선 그 기업이 파산했을 때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든다. 인위적으로 파산시키지 않는 것도 경제 전체의 비효율성을 키워 경쟁력을 좀먹는다. 정부가 큰 기업일수록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것은 이런 딜레마 때문이다.

한보 부도 직후 정부는 빚이 많은 기업에게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주겠다고 밝혔다. 빚이 많으면 도저히 경영을 할 수 없도록 압박해 들어가지 않는 한, 한국 재벌은 빚잔치 경영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은 빚으로 건설된 재벌 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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